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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 /이호우

달밤 이호우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 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익은 풍경이되 달 아래 고쳐보니 돌아올 기약 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 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정화淨化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趙雄傳에 잠 들던 그날 밤도 할버진 율律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니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 조웅전(趙雄傳) : 조선 시대의 대표적 군담 소설 * 율(律) : 율시(律詩). 여덟 구로 되어 있는 한시의 한 형태 ―신한국문학전집36『시조선집』(어문각,1981)

노천명 -자화상 /사슴

자화상 /노천명 오 저 일촌 오푼 키에 이 촌이 부족한 불만이 있다. 부얼부얼한 맛은 전혀 잊어버린 얼굴이다.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하기 어려워한다. 그린 듯 숱한 눈썹도 큼직한 눈에는 어울리는 듯도 싶다마는…… 전 시대 같으면 환영을 받았을 삼단 같은 머리는 클럼지한 손에 예술품답지 않게 얹혀져 가날픈 몸에 무게를 준다.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격은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했을 게다.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세 온스의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색나게 내 얼굴에 쓸 데가 있는 것을 잘 알 것만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조그만 유언비어에도 비겁 하게 삼간..

자화상 시 모음 - 윤동주,서정주,노천명,김현승,유안진,최금녀, 신현림, 이수익, 고은, 임영조, 정희성 외...

자화상 시 모음 - 윤동주,서정주,노천명,김현승,유안진,최금녀, 신현림, 이수익, 고은, 임영조, 정희성 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1. 1. 31. 15:35 자화상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문학과지성사 ..

여는 시 /송영미

여는 시 송영미 나는 밤마다 당신이 들어올 수 있도록 열어두는 쪽문입니다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오직 당신만이 들어오도록 열어두는 쪽문 당신은 그 문틈으로 달빛을 타고 와서는 나에게 살며시 입맞춤만 남겨둔 채 그렇게 말없이 가곤 합니다 어쩌다 눈물이 나도록 기다림에 지친 나는 그 쪽문마저 닫고 싶을 때도 있지만 나는 밤마다 나의 문으로 들어와 당신이 편히 쉬어갈 수 있도록 이불 한 자락을 펼쳐 둡니다 당신이 기나긴 여행을 끝낸 다음 편히 쉬어가도록 말입니다 ―고경연 송영미 신순말 동인시집『삼색제비꽃씨』(세종기획, 2023)

시를 읽는 것은 시인의 마음을 읽는 일이다 / 이구한/ 시인 · 문학평론가

시를 읽는 것은 시인의 마음을 읽는 일이다 이구한/ 시인 · 문학평론가 시를 읽는 것은 시인의 마음을 읽는 일이다. 시인의 의식 흐름과 세계를 향한 인식의 깊이를 읽는 일이다. 시를 쓰는 입장에서 대상을 바라본 시선을 따라가야 한다. 시인이 사물을 감각으로 보느냐, 의식으로 보느냐, 아니면 무의식으로 보느냐, 또한 대상의 실체를 보느냐, 존재를 보느냐, 아니면 무의식으로 보느냐, 사실과 진실 사이에서, 보이는 사실을 통해 보이지 않는 진실을 발견하는 작업이다. 때로는 착란의 순간에 시간의식이 중첩되기도 한다. (p. 4)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은 몸으로 지각한 세계이며, 정신으로 의식하기 전에 몸의 감각으로 지각한 세계이다. 따라서 이를 '몸의 현상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데카르트나 헤겔은 정신과 육체를..

돌아가시다 /​김나연

돌아가시다 ​김나연 큰길 버스에서 내려 야트막한 고갯길 모퉁이를 돌면 산자락에 안긴 새 둥지 같은 고향 마을이 있었다 순자네 돌담을 돌아가면 마을 뒷길이었다 천지분간 못하던 어릴 적엔 ‘돌아가셨다’라는 말을 그 돌담길을 돌아가듯 빙 돌아간다는 말로 알았다 계절이 돌아와 소쩍새 울고 하얀 찔레꽃 다시 돌아와 향기를 날려도 산모퉁이를 돌아갔는지 돌담길을 돌아갔는지 한번 돌아간 이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반년간『시에티카』(2023년 상반기호)

정인보 -자모사(慈母詞) 1- 40수

자모사(慈母詞) 1- 40수 정인보 1 가을은 그 가을이 바람불고 잎 드는데 가신 님 어이하여 돌오실 줄 모르는가 살뜰히 기르신 아이 옷 품 준 줄 아소서 2 부른 배 골리보고 나은 얼굴 병만 여겨 하루도 열두 시로 곧 어떨까 하시더니 밤송인 쭉으렁*인 채 그지 달려 삽내다 3 동창에 해는 뜨나 님 계실 때 아니로다 이 설움 오늘날을 알았드면 저즘미리 먹은 맘 다 된다기로 앞 떠날 줄 있으리 4 차마 님의 낯을 흙으로 가리단 말 우굿이* 어겼으니 무정할 손 추초(秋草)로다 밤 이여 꿈에 뵈오니 편안이나 하신가 5 반갑던 님의 글월 설움될 줄 알았으리 줄줄이 흐르는 정 상기 아니 말랐도다 받들어 낯에 대이니 배이는* 듯하여라 6 므가나* 나를 고히 보심 생각하면 되 서워라 내 양자(樣子)* 그대로를 님이 ..

유리의 기술 /정병근

유리의 기술 정병근 유리창에 몸 베인 햇빛이 피 한 방울 없이 소파에 앉아 있다 고통은 바람인가 소리인가 숨을 끊고도, 저리 오래 버티다니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자 햇빛은 비로소 신음을 뱉으며 출렁인다 고통은 칼날이 지나간 다음에 찾아오는 법 회는 칼날의 맛이 아니던가 깨끗하게 베인 과일의 단면은 칼날의 기술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풍경의 살을 떠내는 저 유리의 기술, 머리를 처박으며 붕붕거리는 파리에게 유리는 불가해한 장막일 터, 훤히 보이는 저곳에 갈 수 없다니! 이쪽과 저쪽, 소리와 적막 그 사이에 통증 없는 유리의 칼날이 지나간다 문을 열지 않고도 안으로 들이는 단칼의 기술, 바람과 소리가 없다면 고통도 없을 것이다 ―시집『번개를 치다』(문학과지성사, 2014)

해, 저 붉은 얼굴 /이영춘

해, 저 붉은 얼굴 이영춘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십만 원 읎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새 만석 같은 이 말, 그 한마디 뱉지 못해 하얗게 몸을 뒤척이시다가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감추시고 천형처럼 무거운 그 말 뱉으셨을 텐데 철부지 초년생 그 딸 "아부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 싹뚝 무 토막 자르듯 그 한마디 뱉고 돌아섰던 녹 쓴 철대문 앞 골목길, 가난한 골목길의 그 길이 만큼 내가 뱉은 그 말, 아버지 심장에 천 근 쇠못이 되었을 그 말, 오래오래 가슴 속 붉은 강물로 살아 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닿고 있다 ―영어일..

문정희 -남편 /부부

남편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민음사, 2004)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11』 (조선일보 연재, 2008) -------------------- 부부 문정희 부부란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