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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홍혜향

노을 홍혜향 더위에 지친 바람이 불러오는 저녁 밥을 먹고도 헛헛할 때가 있다 부엌창에 걸린 해에서 단물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붉은 해가 넘어가기 전에 서둘러 꼭지째 뚝 따왔다 다디단 냄새가 났다 내 속에 단물을 채워줄 노을을 반으로 잘랐다 그런데 웬일일까 길어진 한여름을 따왔는데 속이 하얗다 저녁의 불빛을 비춰 봐도 풋냄새가 흘러나왔다 어느 외로운 사람이 씨를 뿌렸을까 설익은 속을 들여다보다 단맛이 풍기는 한 사람을 생각한다 저 노을도 멀리 가 있는 한 사람 품고 있는 게 분명하다 저녁 먹자고 하면 빛의 속도로 와서 다 비우는 사람 입술 안쪽이 자주 헐어 하얗게 부풀어 오르는 사람 여름내 들어앉아 있을 것이다 덜 익었다고 다시 걸어둘 수도 없는 이 노을을 마음에 묻어두기로 한다 ―「착각의시학」(2023...

밀크캐러멜을 우물거리며 /이경림

밀크캐러멜을 우물거리며 이경림 장대비가 쏟아지지 않는 거실에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아파트와 나무와 길들을 본다 내가 안을 떠나지 않듯 비는 밖을 떠나지 않는다 천지가 밖인데 밖인 비는 어디로 가는가 천지가 안인데 안인 나는 어디로 가는가 비가 온몸으로 밖을 살듯 나는 전신으로 안을 산다 밖인 비는 레고 불록 속 같은 이 칸칸의 안을 알까? 어쨌든 비는 퍼붓는다 퍼붓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듯 비는 내린다 우산을 쓰고 빗속으로 들어간다. 내리꽂히며 튕겨 나가는 비 꽂힌 자리에 질펀히 드러눕는 비 천지사방 몸을 늘이는 비 투명한 연체동물 같은 비 누군가 우산 밑에 숨어 길모퉁이를 돌아간다 빗줄기 사이로 난 가느다란 길로 무슨 그림자 같은 것이 사라진다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자동차들이 달려간다. 장대비 쏟아진..

먼지의 옷 /이오동

먼지의 옷 이오동 명품은 어느 곳에서든 당당하다 그것은 전장의 뚫을 수 없는 갑옷과 같다 그는 지갑을 뒤적이고 있다 겹겹의 속에 무엇이 있는 진 모르지만 소화불량에 걸린 것 같은 불룩한 몸에서 많이도 먹었구나 짐작할 뿐이다 입생로랑의 노랑 잎새는 떨어지고 정지된 카드와 색 바랜 복권 몇 장 차마 버리지 못한 영수증과 고지서들 영양가 없이 토해낸 속이 쭈글쭈글하다 그동안에 해왔던 일과 소중했던 것들이 무엇을 위한 투쟁이었을까 구석구석 먼지가 똬리를 틀고 있다 만물의 시작과 끝에는 먼지가 있는 것일까 탁탁 지갑을 턴다 한때 보물이었다고 반짝반짝 빛을 내며 먼지가 흩어진다 ​ ―시집『먼지의 옷』(도서출판 홍두깨, 2023)

라이프핵...손가락은 당신의 특성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떠한 손가락을 가지고 있나요?

라이프핵 손가락은 당신의 특성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떠한 손가락을 가지고 있나요? 이 연구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구는 항상 이루어져 왔고 대부분의 결과는 우리가 생각하던 바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너무 흥미로워서 발표를 하지 못한 결과들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즐거운 일일 수 있고, 때로는 여러분들이 알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알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더 많은 연구가 먼저 완료되어야 하는 필요로 인해 결과가 정확한지 확신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손가락 저희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손가락이 당신의 특성에 대해 말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 연구는 손가락에 초점을 맞추고..

나는 슬픔을 독학했다 /김대호

나는 슬픔을 독학했다 김대호 슬픔은 수학이었다 수시로 슬픔의 문제를 풀었다 슬픔의 공식이 있었으나 슬픔을 풀 때는 공식에 대입했다 내 슬픔과 당신의 슬픔을 잇는 가장 가까운 선을 구하는 문제는 아직도 푸는 중 당신의 인생을 더하고 내 인생을 빼고 당신과 나의 감정을 미적분하는 사이 날이 저물었다 오래된 내 병은 어떤 공식을 대입해도 풀리지 않았다 지독하다는 말만 되뇌었다 넬슨 만델라는 모든 사람에겐 선이 있다고 믿었다 나 역시 성선설을 믿고 있지만 몸은 항상 뻣뻣하다 착하게 살려는 노력을 포기하면 슬픔의 방정식은 풀린다 내 불행이 슬픔의 근육을 단련한다 허술한 희망보다 단단한 슬픔은 얼마나 건강해 보이는가 슬픔의 답안지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지우지 못한 살림살이같이 숫자와 공식과 괄호만 남아있다 ―..

택배 /정호승

택배 정호승 슬픔이 택배로 왔다 누가 보냈는지 모른다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다 서둘러 슬픔의 박스와 포장지를 벗긴다 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 않는다 누가 보낸 슬픔의 제품이길래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이길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나에게 배송돼 왔나 포장된 슬픔은 나를 슬프게 한다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택배로 온 슬픔이여 슬픔의 포장지를 스스로 벗고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나에게만은 슬픔의 진실된 얼굴을 보여다오 마지막 한방울 눈물이 남을 때까지 얼어붙은 슬픔을 택배로 보내고 누가 저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지 그를 찾아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 ―시집『슬픔이 택배로 왔다(창비, 2022)

폐지라는 이름 /김영희

폐지라는 이름 김영희 허리에 힘을 빼니 관절도 포개지고 한 모금 남아있던 숨마저 토해내며 담았던 허공조차도 비워내니 가볍다 손수레 타고 가는 마지막 나들이길 노숙의 쓸쓸함도 밟히던 그 흔적도 다 잊은 아이들처럼 들썩들썩 즐겁다 누구의 이름 하나 빛내던 숨찬 날들 감싸고 덮어줘도 무참히 찢긴 시간 시치미 뚝 잡아떼고 주억대는 고갯짓 빛나던 짧은 인연 없던 양 접어놓고 막 눈뜬 꽃잎처럼 이 순간 받은 이름 바람이 노래하는 곳 제자리로 가는 길 ―『강원시조』(2023년 제38집)

구르는 돌은 둥글다 / 천양희

구르는 돌은 둥글다 천양희 조약돌 줍다 본다 물 속이 대낮 같다 물에도 힘이 있어 돌을 굴린 탓이다 구르는 것들은 모서리가 없어 모서리 없는 것들이 나는 무섭다 이리 저리 구르는 것들이 더 무섭다 돌도 한자리 못 앉아 구를 때 깊이 잠긴다 물먹은 속이 돌보다 단단해 돌을 던지며 돌을 맞으며 사는 게 삶이다 돌을 맞아본 사람들은 안다 물을 삼킨 듯 단단해진 돌들 돌은 언제나 뒤에서 날아온다 날아라 돌아, 내 너를 힘껏 던지고야 말겠다 ―시집『너무 많은 입』(창비,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