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과 사진/시 읽기 127

나 하나 꽃피어 /조동화

나 하나 꽃피어 조동화  나 하나 꽃 피어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말하지 말아라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결국 풀밭이 온통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말하지 말아라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결국 온산 활활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ㅡ시집『나 하나 꽃피어』(초록숲, 2013년)      이 시를 포털사이트에서 검색을 해보면 카페와 블러그, 게시판, 웹문서 등에서 걷어놓은 주렴 내리듯 주르르 검색이 낸다. 일반인들 사이에 회자는 되고 있었지만 이 시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2012년 11월 한국기자협회 대선 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알려지고부터이다. 당시 안철수 무소속 대통령후보가 기자토론회 말미에서 앞 구절을 잠깐 낭독을 했었다. 사실 나도 그때 처음 이 시를 알게 되었는데 이 시는 포털사..

파두 /이우디

파두 이우디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고장난 후렴구가 병실 창문 넘어가면새를 품은 허공은 종종 금이 갔다새들의 눈물 받아먹은 구름북쪽으로 흐르다 신호등에 걸리고노래인지 신음인지 흐늑흐늑창밖, 은행나무 흔들면부러진 화살 같은 햇살 속에서죽은 물고기가 떠오르기도 하였다병원 뒤뜰에 납작납작 주저앉은 우울한 가락민들레처럼 채송화처럼봄, 여름 다 보내고도 시들 줄을 몰랐다계단에 걸터앉은 앉은뱅이처럼일어설 줄 모르는 마른 뼈들이연주하는 두만강,침묵하는 먼 강바닥으로아버지 자꾸 미끄러지셨다님에게, 로 가시는 환승역에서 잠시젖은 몸 말리는 뱀처럼 마르고 마르다가푸석푸석 입김만 날리다가더는 남길 게 없다는 듯거품만 게우다가,음의 파도 저어가는 파두처럼낡은 의자에 앉아 듣던 높낮이 한결같아서은행잎 떨구는..

근위병 /하이네

근위병 하이네 프랑스로 돌아가는 두 근위병.그들은 러시아의 포로였었다.독일의 병영에 막 도착했을 때두 사람은 고개를 떨구었다. 거기에서 슬픈 소문을 듣게 되었나니프랑스는 전쟁에 패배하였고대군은 뿔뿔이 흩어졌으며-,황제께서, 황제께서 잡히셨단다. 두 사람은 서로 힘껏 끌어안으며슬픈 소식에 함께 울었다하나가 말하기를 너무너무 슬퍼지니나의 옛 상처가 다시 쑤신다. 다른 병사 말하기를 끝장 난거야,너와 함께 그대로 죽고 싶지만,집에는 처자가 기다리고 있다네.나 없으면 그들은 굶어 죽는다네-. 아내와 자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내게는 그보다 큰 열망이 있나니,처자야 굶주리면 동냥이나 다니라지,황제께서, 황제께서 잡혀가지 않았는가! 전우여, 내 부탁을 들어주게나,내가 이제 여기서 죽게 된다면내 시체를 프랑스로 가지..

돌탑 /고미숙

돌탑 고미숙  누구의 소원일까차곡차곡 쌓여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돌은불안한 소원이 되어가장 낮은 곳에 있는 돌은소원을 받쳐주는 소원이 되어탑을 이루고 있다 소원이 깃들어 있지 않는돌도 한 개 끼어 있다 돌의 마음이 무거울까봐아무런 소원 없이내가 올려놓은납작 돌 한 개   ―월간『월간문학』(2005년 11월호)  ---------------------   옛날에는 마을마다 뒷산에는 산신당이나 성황당이 있고 마을 입구에는 장승이나 솟대, 돌탑을 세워 신앙의 대상물로 삼으며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했었다. 그러나 그런 전통마을은 민속촌에나 있고 얼마 남아 있지 않지만 민간신앙의 대상물인 돌탑은 어디를 가도 쉽게 만날 수가 있다.   장방형으로 또는 삼각형으로 제대로 쌓은 돌탑도 많지만 왠지 나는 정갈하게..

바람 시 속에서 -정한모

바람 속에서 정한모  1. 내 가슴 위에 바람은발기발기 찢어진기폭어두운 산정에서하늘 높은 곳에서비정하게 휘날리다가절규하다가지금은그 남루의 자락으로땅을 쓸며경사진 나의 밤을거슬러 오른다소리는창밖을지나는데그 허허한 자락은 때묻은이불이 되어내 가슴위에싸늘히앉힌다 2. 남루한 기폭  바람은 산모퉁이 우물 속 잔잔한 수면에 서린 아침 안개를 걷어 올리면서 일어났을 것이다  대숲에 깃드는 마지막 한 마리 참새의 깃을 따라 잠들고 새벽이슬 잠 포근한 아가의 가는 숨결 위에 첫마디 입을 여는 참새소리 같은 청청한 것으로 하여 깨어났을 것이다  처마 밑에서 제비의 비상처럼 날아온 날신한 놈과 숲 속에서 빠져나온 다람쥐 같은 재빠른 놈과 깊은 산골짝 동굴에서 부스스 몸을 털고 일어나온 짐승 같은 놈들이 웅성웅성 모여서 그..

지옥은 없다 /백무산

지옥은 없다 백무산  고깃집 뒷마당은 도살장 앞마당이었다고기 먹으러 갔다가 그곳에서 일하는 친구 따라갔다구워먹는 데만 하루에 황소 서너 마리를 소비한다는대형 고깃집 수백 명이 한꺼번에 파티를 열고회식을 하고 건배를 하고 연중무휴요란하고 벅적거리는 대궐 같은 집이다 그는 쇠를 자르고 기계를 분해하고기름 먹이는 일을 하다 직장을 옮겨 우족을 자르고뼈를 발라내고 피를 받아내는 일을 한다소를 실은 차들과 고기를 실어 나르는트럭들이 들락거리는 마당을 지나 전동문을 열고 들어서니 피를 뒤집어쓴잘린 소 대가리가 거대한 탑을 이루고 있다바닥은 피와 똥과 체액으로 질펀한 갯벌이다더운 피의 증기가 뻑뻑한 한증막이다하수구 냄새와 범벅이 된 살 비린내가 고체 같다욕탕 같은 수조는 똥과 내장의 늪이다 뜯긴 살점이 사방에 튀고 ..

자화상 /박형진

자화상  박형진    마당 앞에 풀이나 뽑느라 아무것도 못 했어  거울 앞에 서면  웬 낯선 사내  오십 넘겼지 아마?    ―시집『콩밭에서』(보리, 2011)    ---------------------------------------------  ‘자화상‘ 제목으로 쓰여진 시가 참으로 많다.   이미란, 정희성, 박두진. 박용래, 한하운, 이수익, 김초혜, 고은, 최금녀, 신현림, 김현승, 유안진, 임영조, 노천명, 공광규, 마종기, 김상미, 황성희, 박지우, 김언 시인 등…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아 신인 같은 무명의 시인부터 원로 중견 시인까지 실로 많은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많은 자화상의 시를 썼다.    많은 자화상 시 중에 비교적 짧은 박형진 시인의 자화상 시 한 편을 본다. 길지 않은..

아라 연꽃 /신순말

아라 연꽃 신순말  칠백 년 잠 속에서 씨앗이 꿈꾸었던  세상의 하늘빛은 오늘과 같았을까  기나긴 시간의 실타래 아라*에서 멈추고   어제의 꿈을 건넌 꽃송이 눈을 뜨면  단잠에서 막 깨어난 아이의 볼이 붉다  선명한 저 연꽃 같은 아이들아 아이들아   * 아라 : 아라가야 땅이었던 경남 함안. 700년 전의 연씨를 출토하여 발아에 성공, 홍련을 피워내고 그 이름을 '아라홍련'이라 함.   ―계간『詩하늘』(2020년 가을호)      식물은 위대한다. 우선 그 생명력에 감탄을 하고 척박한 곳 산성 땅 어디서나 자라는 식물이 부럽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왜 안 그런가. 보라 식물의 씨앗은 보도블럭, 담벼락 구멍, 지붕 위 안 가는 곳이 없고 못 가는 곳이 없다. 낭떠러지 절벽의 끝 아슬아슬한 곳에서도 그 생..

감자꽃 /이재무

감자꽃 이재무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피어 더욱 서러운 女子 자주색 고름 물어뜯으며 눈으로 웃고 마음으론 울고 있구나 향기는, 저 건너 마을 장다리꽃 만나고 온 건달 같은 바람에게 다 앗겨버리고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비탈 오지에 서서 해종일 누구를 기다리는가 세상의 모든 꽃들 생산에 저리 분주하고 눈부신 생의 환희 앓고 있는데 불임의 女子, 내 길고긴 여정의 모퉁이에서 때묻은 발목 잡고 퍼런 젊음이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내 女子, 노을 속 찬란한 비애여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피어 더욱 서러운 女子 -시집『위대한 식사』(세계사. 2002) 감자는 밀과 벼, 옥수수와 함께 세계 4대 작물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약 7천 년 전 페루 남부에서 재배를 시작했고 남미 원주민들에게 주식이었다고 한..

소주병 /공광규

소주병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ㅡ시집『소주병』(실천문학사, 2004) -------------- 다리를 다쳐 거의 2년 정도 산을 못 다니다가 2년을 또 혼자서 외롭게 홀로 산을 다닌 적이 있었다. 혼자 산행을 하다보면 의외로 혼자 산행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는데 혼자 산행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우선 홀가분하다. 약속도 시간제약도 없으니 코스 변경도 그 날의 컨디션에 따라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발길 닿는 대로 갈 수도 있다. 또 하나 좋은 점은 나뭇잎 흔들리는 바람 소리, 여러 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