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과 사진/시 읽기 122

지옥은 없다 /백무산

지옥은 없다 백무산  고깃집 뒷마당은 도살장 앞마당이었다고기 먹으러 갔다가 그곳에서 일하는 친구 따라갔다구워먹는 데만 하루에 황소 서너 마리를 소비한다는대형 고깃집 수백 명이 한꺼번에 파티를 열고회식을 하고 건배를 하고 연중무휴요란하고 벅적거리는 대궐 같은 집이다 그는 쇠를 자르고 기계를 분해하고기름 먹이는 일을 하다 직장을 옮겨 우족을 자르고뼈를 발라내고 피를 받아내는 일을 한다소를 실은 차들과 고기를 실어 나르는트럭들이 들락거리는 마당을 지나 전동문을 열고 들어서니 피를 뒤집어쓴잘린 소 대가리가 거대한 탑을 이루고 있다바닥은 피와 똥과 체액으로 질펀한 갯벌이다더운 피의 증기가 뻑뻑한 한증막이다하수구 냄새와 범벅이 된 살 비린내가 고체 같다욕탕 같은 수조는 똥과 내장의 늪이다 뜯긴 살점이 사방에 튀고 ..

자화상 /박형진

자화상  박형진    마당 앞에 풀이나 뽑느라 아무것도 못 했어  거울 앞에 서면  웬 낯선 사내  오십 넘겼지 아마?    ―시집『콩밭에서』(보리, 2011)    ---------------------------------------------  ‘자화상‘ 제목으로 쓰여진 시가 참으로 많다.   이미란, 정희성, 박두진. 박용래, 한하운, 이수익, 김초혜, 고은, 최금녀, 신현림, 김현승, 유안진, 임영조, 노천명, 공광규, 마종기, 김상미, 황성희, 박지우, 김언 시인 등…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아 신인 같은 무명의 시인부터 원로 중견 시인까지 실로 많은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많은 자화상의 시를 썼다.    많은 자화상 시 중에 비교적 짧은 박형진 시인의 자화상 시 한 편을 본다. 길지 않은..

아라 연꽃 /신순말

아라 연꽃 신순말  칠백 년 잠 속에서 씨앗이 꿈꾸었던  세상의 하늘빛은 오늘과 같았을까  기나긴 시간의 실타래 아라*에서 멈추고   어제의 꿈을 건넌 꽃송이 눈을 뜨면  단잠에서 막 깨어난 아이의 볼이 붉다  선명한 저 연꽃 같은 아이들아 아이들아   * 아라 : 아라가야 땅이었던 경남 함안. 700년 전의 연씨를 출토하여 발아에 성공, 홍련을 피워내고 그 이름을 '아라홍련'이라 함.   ―계간『詩하늘』(2020년 가을호)      식물은 위대한다. 우선 그 생명력에 감탄을 하고 척박한 곳 산성 땅 어디서나 자라는 식물이 부럽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왜 안 그런가. 보라 식물의 씨앗은 보도블럭, 담벼락 구멍, 지붕 위 안 가는 곳이 없고 못 가는 곳이 없다. 낭떠러지 절벽의 끝 아슬아슬한 곳에서도 그 생..

감자꽃 /이재무

감자꽃 이재무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피어 더욱 서러운 女子 자주색 고름 물어뜯으며 눈으로 웃고 마음으론 울고 있구나 향기는, 저 건너 마을 장다리꽃 만나고 온 건달 같은 바람에게 다 앗겨버리고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비탈 오지에 서서 해종일 누구를 기다리는가 세상의 모든 꽃들 생산에 저리 분주하고 눈부신 생의 환희 앓고 있는데 불임의 女子, 내 길고긴 여정의 모퉁이에서 때묻은 발목 잡고 퍼런 젊음이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내 女子, 노을 속 찬란한 비애여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피어 더욱 서러운 女子 -시집『위대한 식사』(세계사. 2002) 감자는 밀과 벼, 옥수수와 함께 세계 4대 작물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약 7천 년 전 페루 남부에서 재배를 시작했고 남미 원주민들에게 주식이었다고 한..

소주병 /공광규

소주병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ㅡ시집『소주병』(실천문학사, 2004) -------------- 다리를 다쳐 거의 2년 정도 산을 못 다니다가 2년을 또 혼자서 외롭게 홀로 산을 다닌 적이 있었다. 혼자 산행을 하다보면 의외로 혼자 산행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는데 혼자 산행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우선 홀가분하다. 약속도 시간제약도 없으니 코스 변경도 그 날의 컨디션에 따라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발길 닿는 대로 갈 수도 있다. 또 하나 좋은 점은 나뭇잎 흔들리는 바람 소리, 여러 새가..

불멸의 새가 울다 /진란

불멸의 새가 울다 진란 언어의 새들이 붉은 심장 속에 둥지를 틀다 관념의 깃털을 뽑아 깔고 그 위에 씨알을 품었다 쓸쓸한 귀를 열고 이름 없는 시인의 가슴으로 들어간 밤 어지러운 선잠에 들려올려지는 새벽, 어디선가는 푸른 환청이 들렸다 꽃-피-요 꽃-피요 -시집『혼자 노는 숲』(나무아래서, 2011) ------------------------- 시집을 낼 때 첫 장에 놓일 머리 시에 고민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서점에 가서 책을 살 때도 소설도 첫 장 첫 문단이 흥미가 있어야 뒤를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다. 시 역시 첫 장에 있는 시를 보고 살까 말까 결정이 이루어질 때가 많지요. 평론가들이나 시인들도 시집을 받으면 일단 첫 머리의 시를 읽어 본다고 합니다. 좋으면 그래, 하고 한 장 더..

통증 /고영민

통증 고영민 중국에는 편지를 천천히 전해주는 느림보 우체국이 있다지요 보내는 사람이 편지 도착 날짜를 정할 수 있다지요 한 달 혹은 일 년, 아니면 몇 십 년 뒤일 수도 있다지요 당신에게 편지 한 통 보냅니다 도착 날짜는 그저 먼 훗날 당신에게 내 마음이 천천히 전해지길 원합니다 당신에게 내 마음이 천천히 전해지는 걸 오랫동안 지켜보길 원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수십 번, 수백 번의 후회가 나에게 왔다가고 어느 날 당신은 내가 쓴 편지 한 통을 받겠지요 겉봉을 뜯고 접은 편지지를 꺼내 펼쳐 읽겠지요 그때 나는 지워진 어깨 너머 당신 뒤에 노을처럼 서서 함께 편지를 읽겠습니다 편지가 걸어간 그 느린 걸음으로 내내 당신에게 걸어가 당신이 편지를 읽어 내려가며 한 홉 한 홉 차올랐던 숨을 몰아 내쉬며 ..

사람꽃 /고형렬

사람꽃 고형렬 복숭아 꽃빛이 너무 아름답기로서니 사람꽃 아이만큼은 아름답지 않다네 모란꽃이 그토록 아름답다고는 해도 사람꽃 처녀만큼은 아름답지가 못하네 모두 할아버지들이 되어서 바라보게, 저 사람꽃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는가 뭇 나비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여도 잉어가 아름답다고 암만 쳐다보아도 아무런들 사람만큼은 되지 않는다네 사람만큼은 갖고 싶어지진 않는다네 ―시집『성에꽃 눈부처』(창작과비평사, 1998) 3월입니다. 이제 곧 모든 꽃들이 서로 다투어 피어나겠지요. 목련이 날아가는 새처럼 귀족 같은 우아한 몸짓으로 피어나면 잎도 나지 않은 생강나무가 산 곳곳에 노란 등불을 켤 것이고 진달래, 진달래가 모다기모다기 우리나라 온 산천을 분홍빛 물을 들일 것입니다. 둘째 아이가 다섯 살 때쯤이었을 겁니다. 밖..

새 /천상병

새 천상병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시집(『새』(조광출판사. 1968 : 『천상병 전집』. 평민사. 2010)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 천상병 시인의 시는 후기시가 초기시보다 못하다는 평을 듣는다. 2010년 평민사에서에서 ..

얼굴 반찬 /공광규

얼굴 반찬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 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 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시집『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 2008) 언제부턴가 혼밥이라는 말이 일상에서 식상한 말처럼 유통이 되고 있다. 다음 어학사전에도 올라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