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홍혜향
더위에 지친 바람이 불러오는 저녁
밥을 먹고도 헛헛할 때가 있다
부엌창에 걸린 해에서 단물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붉은 해가 넘어가기 전에 서둘러 꼭지째 뚝 따왔다
다디단 냄새가 났다
내 속에 단물을 채워줄 노을을 반으로 잘랐다
그런데 웬일일까
길어진 한여름을 따왔는데
속이 하얗다
저녁의 불빛을 비춰 봐도
풋냄새가 흘러나왔다
어느 외로운 사람이 씨를 뿌렸을까
설익은 속을 들여다보다 단맛이 풍기는 한 사람을 생각한다
저 노을도 멀리 가 있는 한 사람 품고 있는 게 분명하다
저녁 먹자고 하면 빛의 속도로 와서 다 비우는 사람
입술 안쪽이 자주 헐어 하얗게 부풀어 오르는 사람
여름내 들어앉아 있을 것이다
덜 익었다고 다시 걸어둘 수도 없는 이 노을을
마음에 묻어두기로 한다
―「착각의시학」(2023.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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