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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을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

돈 워리 비 해피 /권혁웅

돈 워리 비 해피권혁웅1.워리는 덩치가 산만한 황구였죠우리집 대문에 줄을 매서 키웠는데지 꼴을 생각 못하고아무나 보고 반갑다고 꼬리치며 달려드는 통에동네 아줌마와 애들, 여럿 넘어갔습니다이 피멍 좀봐, 아까징끼 값 내놔그래서 나한테 엄청 맞았지만우리 워리, 꼬리만 흔들며그 매, 몸으로 다 받아냈습니다한번은 장염에 걸려누렇고 물큰한 똥을 지 몸만큼 쏟아냈지요아버지는 약값과 고기 값을 한번에 벌었습니다할교에서 돌아와 보니한성여고 수위를 하는 주인집 아저씨,수육을 산처럼 쌓아놓고 금강야차처럼우적우적 씹고 있었습니다평생을 씹을 듯했습니다 2.누나는 복실이를 해피라고 불렀습니다해피야, 너는 워리처럼 되지 마세달만에 동생을 쥐약에 넘겨주었으니우리 해피 두배로 행복해야 옳았지요하지만 어느날동네 아저씨들, 장작 몇 개..

가죽나무 /도종환

가죽나무 도종환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 내 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했지만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 꼬여 있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보잘것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마리 있으면 편안한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줄 수 없어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이 숲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볼품이 없는 나무라는 걸 내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한 가운데를 두팔로 헤치며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른 게 있다면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

빈 자리가 가렵다 /이재무

빈 자리가 가렵다 이재무 새해 벽두 누군가가 전하는 한 선배 암선고 소식 앞에서 망연자실, 그의 굴곡 많은 이력을 안주로 술을 마시며 새삼스레 서로의 건강 챙기다 돌아왔지만 타인의 큰 슬픔이 내 사소한 슬픔 덮지 못하는 이기의 나날을 살다가 불쑥 휴대폰 액정화면 날아온 부음을 발견하게 되리라 벌떡 일어나 창밖 하늘을 응시하는 것도 잠시 책상서랍의 묵은 수첩 꺼내 익숙하게 또 한 사람의 주소와 전화번호 빨간 줄을 긋겠지 죽음은 잠시 살아온 시간들을 복기하고 남아 있는시간 혜량하게 할 것이지만 몸에 밴 버릇까지 바꾸어놓지는 못할 것이다 화제의 팔할을 건강에 걸고 사는 슬픈 나이, 내 축축한 삶을 건너간 마르고 창백한 얼굴들 자꾸만 눈에 밟힌다 십년을 앓아오느라 웃음 잃은 아내도 그러하지만 생각하면 우리는 모..

어머니 닮네요 /이길원

어머니 닮네요 이길원 밤새 고기 재우고 김밥말던 아내가 눈부비는 내게 운전대 쥐어주고 아침해 깨우며 전방으로 달리더니 "필승"이라 외치는 아들어깨 안고 애처럼 우네요 하루내내 기차타고 버스타고 전방에서 하룻밤을 기다리다 철조망 안에서 김밥 보퉁이 펴며 돌아서 눈물 감추던 어머니처럼 아내도 우네요 아픈데 없냐 힘들지 않냐 많이 먹어라 어머니가 제게 하시던 말을 아내도 하네요 손잡아 보고 얼굴 만져 보고 어머니가 제게 눈물 그렁이듯 그렁이네요 아내의 얼굴 속에 팔순 어머니 주름진 얼굴 ―시집 『계란껍질에 앉아서』(시문학사, 1998) =============== KBS 한국 현대시 탄생 100주년 특집 '시인만세'에서 실시한 대국민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는 김소월의 '진달래꽃' 이라고 ..

바다 아홉 /문인수

바다 이홉 문 인 수 누가 일어섰을까. 방파제 끝에 빈 소주병 하나, 번데기 담긴 종이컵 하나 놓고 돌아갔다. 나는 해풍 정면에, 익명 위에 엉덩이를 내려놓는다. 정확하게 자네 앉았던 자릴 거다. 이 친구, 병째 꺾었군. 이맛살 주름 잡으며 펴며 부우- 부우- 빠져나가는 바다, 바다 이홉. 내가 받아 부는 병나발에도 뱃고동 소리가 풀린다. 나도 울면 우는 소리가 난다. ―시집『배꼽』(창비, 2008 ) 누구였을까요. 바닷가 끝까지 와서 이홉 소주를 마시고 간 이는...분명 세상을 이긴 사내가 아니라 진 사내일 것 같은데 종이컵에 담긴 번데기를 하나씩 입에 넣으며 몇 번에 나누어 마셨을까요. 아니면 답답한 가슴을 쓸어 내리며 화자처럼 한 번에 병나발을 부우- 부우- 불었을까요. 삼발이 방파제 돌머리에 앉아..

홍해리洪海里는 어디 있는가 /홍해리

홍해리洪海里는 어디 있는가 홍해리 시詩의 나라 우이도원牛耳桃源 찔레꽃 속에 사는 그대의 가슴속 해종일 까막딱따구리와 노는 바람과 물소리 새벽마다 꿈이 생생生生한 한 사내가 끝없이 가고 있는 행行과 행行사이 눈 시린 푸른 매화, 대나무 까맣게 웃고 있는 솔밭 옆 마을 꽃술이 술꽃으로 피는 난정蘭丁의 누옥이 있는 말씀으로 서는 마을 그곳이 홍해리洪海里인가. ―시집『비타민 詩』(우리글출판사, 2008) 넓고 큰 바다동네가 어디 있나? 홍해리洪海里는 봉숭아꽃이 만발하는 시詩의 나라 우이골 찔레꽃 속에 있다고 합니다. 우이골은 서울 강북구 삼각산자락에 있는 마을입니다. 우이동(소귀봉)이라는 동명의 유래는 동리 뒤에 있는 삼각산 봉우리 중에 백운봉과 인수봉이 우이동에서 바라보면 소의 귀처럼 생겼기 때문에 소귀봉 즉..

구경거리 /박명용

구경거리 박명용 울안에 갇힌 곰을 보러 갔더니 곰은 는 듯 줄줄이 밀려드는 인간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인간이 곰을 구경하는지 인간이 곰의 구경거리인지 하느님 이 세상 울은 어딥니까. ―시집『안개밭 속의 말들』(한국문학도서관, 2007) 동물원에 갑니다. 과천대공원에도 있고 용인 에버랜드에도 있고 능동 어린이대공원, 남산에도 우리에 갇힌 동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곰뿐 아니라 호랑이, 사자, 코끼리, 원숭이 등 모든 동물이 갇혀있다고 생각하며 동물들을 구경합니다. 그런데 이 시는 울안에 갇힌 곰이 줄줄이 밀려드는 인간들을 도리어 감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발상을 전환한 이런 시는 되씹어보는 맛도 있고 한 번 보면 기억에서 잘 보존이 됩니다. 함민복 시인의 「섬」이라는 시를 보면 물이 '울타리고, 낮고, 길' ..

내 오십의 부록 /정숙자

내 오십의 부록 정숙자 편지는 내 징검다리 첫 돌이었다 어릴 적엔 동네 할머니들 대필로 편지를 썼고 고향 떠난 뒤로는 아버님께 용돈 부쳐드리며 "제 걱정 은 마세요" 편지를 썼다 매일 밤 내 동생 인자에게 편지를 썼고 두레에게도 편지를 썼다 시인이 되고부터는 책 보내온 문인들에게 편지를 썼고 마음 한구석 다쳤을 때는 구름에게 바람에게 편지를 썼다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울 때는 저승으로 편지를 썼고 조용한 산책로에선 풀잎에게 벌레에게 공기에게도 편지 를 썼다 셀 수 없이 많은 편지를 쓰며 나는 오늘까지 건너왔노라 희망이 꺾일 때마다 하느님께 편지를 썼고 춥고 외로울 때는 언젠가 묻어준 고양이 무덤 앞에서 우 울을 누르며 편지를 썼다 어찌어찌 발표된 몇 줄 시조차도 한 눈금만 들여다보면 모습을 바꾼 편지에 다..

승방에서 생긴 일 /최명란

승방에서 생긴 일 최명란 평창동 산꼭대기 오뚝 앉은 승방에서 한참을 놀다가 우리는 돌아오고 늦게 찾아온 그 여인은 승방에 남았더라 어쩌면 좋아요! 저 뽀얀 가슴살을 가지고 스님 혼자 있는 승방에 남았어요 스님이고 보살인데 어떨까 아니야 내가 알기론 앙증맞은 그 여인의 품에 스님은 몇 번이나 드나들지 몰라 아니 스님이 집적이면 여인은 귀찮아할까 멀쩡한 사지로? 시간이 더 늦어지면 돌아오기란 더 만만치 않을 텐데 집에서는 어떤 핑계로 나왔을까 여기서 밤을 지내기까지의 변명을 채워 넣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늘여놓았을까 내가 마음속으로 물었을 뿐인데 여인은 용케도 들었다는 듯 낮에 들꽃축제 갔다가 오는 길이라고 머리칼이 숭숭하고 화장도 반쯤 지워진 까닭을 설명하듯 말하더라 아니, 남편이 있는 여인일까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