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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연인 /김백겸

하늘연인 김백겸 아무 생각도 없이 만년 잠을 자고 있다고 믿은 바위의 틈 속으로도 무엇인가 뱀처럼 구멍을 파고든다 느티나무아래 평화롭게 언덕이 누워있고 시냇물이 흐르던 마을에서도 어떤 위험한 사건이 방화처럼 발생한다 무엇인가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에 샘물처럼 콸콸 터져 흐르더니 아직 날이 저물지 않은 황혼에 얼음처럼 얼어붙는다 과거에 화려한 신부였으며 미래에 무덤에 누울 반려자였으나 지금은 악처로 살면서 희로애락의 바가지를 긁는 당신 귀에 캄캄한 바람으로 들어와 앉은 당신 눈에서 밝은 벌레로 기어나가 온 세상의 풍경을 깨물어보는 당신 수천의 손가락과 발가락으로 시간의 육체를 모두 만져보고도 애욕이 멈추지 않아 또 다른 연인을 꿈꾸는 당신 청첩장에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당신 ―시집『비빌 방』(시선사, ..

이름을 지운다 /허형만

이름을 지운다 허형만 수첩에서 이름을 지운다 접니다. 안부 한 번 제대로 전하지 못한 전화번호도 함께 지운다 멀면 먼 대로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살아생전 한 번 더 찾아뵈지 못한 죄송한 마음으로 이름을 지운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몸이 먼저 아는지 안경을 끼고도 침침해지는데 언젠가는 누군가도 오늘 나처럼 나의 이름을 지우겠지 그 사람, 나의 전화번호도 함께 지우겠지 ―시집『그늘』(시월, 2012) 세상에는 사람도 많다. 오늘 하루도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사람들과 마주치기 시작한다.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도 마찬가지다. 버스는 만원이고 지하철도 얼마나 사람들로 넘쳐나는지 흔들리는 손잡이를 잡고 송곳처럼 뻣뻣이 서있어야만 한다. 일행이 아니라면 아는 사람을 만나기도 ..

행방불명 되신 하느님께 보내는 출소장 /고정희

행방불명 되신 하느님께 보내는 출소장 고정희 무릇 너희가 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에서 나온 말씀으로 거듭나리라, 수수께끼를 주신 하느님, 우리 가 영에서 나온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미사일 핵 무기고에서 나오는 살인능력 보유자와 우리들 밥줄을 틀어진 자를 구세주로 받드는 오늘날 이 세상 절반의 살겁과 기아선상의 대하여 어떤 비상정책을 수립하고 계신지요 한나절을 일한 자나 하루 종일 일한 자나 똑같이 최 대 생계비를 지불함이 하늘나라 은총이다 선포하셨건 만, 반평생을 뼈빠지게 일한 자나 일년으로 혼빠지게 일 한 자나 똑같이 임금을 채불당한 채 밀린 품삯 받으로 일본으로 미국으로 다국적기업 뒤꽁무니 쫓아간 우리 딸들이 임금 대신 똥물을 뒤집어쓰고 울부짖을 때 당 신의 말씀은 침묵했습니다 온갖 제국주의..

조장鳥葬 /김선태

조장鳥葬 김선태 티벳트의 드넓은 평원에 가서 한 사십 대 여인의 조장을 지켜보았다. 라마승이 내장을 꺼내어 언저리에 뿌리자 수십 마리의 독수리들이 달려들더니 삽시에 머리카락과 앙상한 뼈만 남았다, 다시 쇠망치로 뼈를 잘게 부수어 밀보리와 반죽한 것을 독수리들이 깨끗이 먹어치웠다, 잠깐이었다. 포식한 독수리들이 하늘로 날아오르자 의식은 끝났다, 그렇게 여인은 허, 공에 묻혔다 독수리의 몸은 무덤이었다 여인의 영혼은 무거운 육신의 옷을 벗고 하늘로 돌아갔다, 독수리의 날개를 빌어 타고 처음으로 하늘을 훨훨 날 수 있었을 게다. 장례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가는 유족들은 울지 않았다, 침울하지도 않았다, 평온했다 대퇴골로 피리를 만들어 불던 스님의 표정도 시종 경건했다, 믿기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생전 못된 놈의..

손목 /윤제림

손목 윤제림 나 어릴 때 학교서 장갑 한 짝을 잃고 울면서 집에 온 적이 있었지 부지깽이로 죽도록 맞고 엄마한테 쫓겨났지 제 물건 하나 간수 못 하는 놈은 밥 먹일 필요도 없다고 엄마는 문을 닫았지 장갑 찾기 전엔 집에 들어오지 말라며. 그런데 저를 어쩌나 스리랑카에서 왔다는 저 늙은 소년은 손목 한 짝을 흘렸네 몇살이나 먹었을까 겁에 질린 눈은 아직도 여덟 살처럼 깊고 맑은데 장갑도 아니고 손목을 잃었네 한하운처럼 손가락 한 마디도 아니고 발가락 하나도 아니고 손목을 잃었네. 어찌할거나 어찌 집에 갈거나 제 손목도 간수 못 한 자식이. 저 움푹한 눈망울을 닮은 엄마 아버지 아니 온 식구가, 아니 온 동네가 빗자루를 들고 쫓을 테지 손목 찾아오라고 찾기 전엔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찾아보세나 사람들..

벼랑 위의 사랑 /차창룡

벼랑 위의 사랑 차창룡 모든 사랑은 벼랑 위에서 시작되더라, 당신을 만나고부터 벼랑은 내 마음의 거주지. 금방 날아오를 것 같은 부화 직전의 알처럼 벼랑은 위태롭고 아름다워, 야윈 상록수 가지 붙잡고 날아올라라 나의 마음이여, 너의 부푼 가슴에 날개 있으니, 일촉즉발의 사랑이어라, 세상은 온통 양귀비의 향기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당신과 나는 벼랑에서 떨어졌고, 세상을 우리를 받쳐 주지 않았다. 피가 튀는 사랑이여, 계곡은 태양이 끓는 용광로, 사랑은 그래도 녹지 않았구나. 버릇처럼 벼랑 위로 돌아왔지만, 벼랑이란 보이지 않게 무너지는 법, 평생 벼랑에서 살 수는 없어, 당신은 내 마음을 떠나고 있었다. 떠나는 이의 힘은 붙잡을수록 세는 법인지. 모든 사랑은 벼랑 위에서 끝나더라, 당신을 만나고부터..

야트막한 사랑 /강형철

야트막한 사랑 강형철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언덕 위의 사랑 아니라 태산준령 고매한 사랑 아니라 갸우듬한 어깨 서로의 키를 재며 경계도 없이 이웃하며 사는 사람들 웃음으로 넉넉한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의 사랑 아니라 개운하게 쏟아지는 장대비 사랑 아니라 야트막한 산등성이 여린 풀잎을 적시며 내리는 이슬비 온 마음을 휘감되 아무것도 휘감은 적 없는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이제 마를대로 마른 뼈 그 옆에 갸우뚱 고개를 들고 선 참나리 꿀 좀 핥을까 기웃대는 일벌 한오큼 얻은 꿀로 얼굴 한번 훔치고 하늘로 날아가는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가슴이 뛸 만큼 다 뛰어서 짱뚱어 한 마리 등허리도 넘기 힘들어 개펄로 에돌아 서해 긴 포구를 잦아드는 밀물 마침내 한 바다를 이루는 ―조명숙 엮음『하..

시 비빔밥 /김금용

시 비빔밥 김금용 프라이팬에 물 한 잔 놓고 점심을 먹는다 창틈으로 비껴드는 바람밖엔 숨 쉬고 재잘거리는 소리 전혀 들리지 않는 모두가 죽은 오후 세 시 반에 이승훈시인의 비빔밥 시론을 베껴 먹는다 전기압력밥통에서 식혜가 되어가는 잡곡밥과 기제사에서 쓰고 남은 나물들 된장국물과 김치 조금 섞어 비비다가 마른 김 몇 장과 볶은 깨, 참기름 약간 두르면 비행기 기내음식으로 외국인도 환영한다는 문지방 사라진 웰빙 음식이 탄생한다 클래식과 뽕짝의 경계를 허물고 시와 산문, 그림과 사진 영화의 경계를 허물고 사랑을 구하는 나이와 국경, 性의 구분까지 허물고 오직 눈빛 하나와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열망 하나로 이념도 목적도 필요 없어진 문지방 없는 춘추전국시대에 정해진 요리법이며 트릭도 맛내기도 필요 없는 나만의..

겨울 바다의 화두 /박창기

겨울 바다의 화두 박창기 겨울 바다의 화두 책 좀 읽으라신다 파도책을 펼치면서 수천 권의 시집을 던지면서 제대로 된 시 한 편 쓰라신다 부끄럽다 받은 시집을 펼치면 바다보다 더 넓은데 해변에서 어휘만 줍고 있다 시 한 줄 연결 못해 전전긍긍이다 독기 품은 시 한 편 쓰려면 파도처럼 부서져야 하리 허연 채찍에 갈기갈기 찢어져야 하리 더도 덜도 말고 파도 같은 시 한 편 쓰라신다 -시집『바다경전』(그루, 2005) -------------- 인터넷 "디지털문화예술 아카데미" 사이트에서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의 "문학과 인생" 이라는 제목의 동영상 강의를 보았습니다. 강의가 재미있기도 하지만 문학적으로도 기억할 만한 것이 많아서 반복해서 서너 번을 들었는데 조정래 소설가는 컴퓨터 시대에 지금도 원고지로 글을 ..

쑥국―아내에게 /최영철

쑥국 ―아내에게 최영철 참 염치없는 소망이지만 다음 생애 딱 한번만이라도 그대 다시 만나 온갖 감언이설로 내가 그대의 아내였으면 합니다 그대 입맛에 맞게 간을 하고 그대 기쁘도록 분을 바르고 그대 자꾸 술 마시고 엇나갈 때마다 쌍심지 켜고 바가지도 긁었음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의 그대처럼 사랑한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고맙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아이 둘 온 기력을 뺏어 달아난 쭈글쭈글한 배를 안고 골목 저편 오는 식솔들을 기다리며 더운 쑥국을 끓였으면 합니다 끓는 물 넘쳐 흘러 내가 그대의 쓰린 속 어루만지는 쑥국이었으면 합니다 ―시집『찔러본다』(문학과지성사, 2010) --------------------- 아내를 위한 노래 사부곡(思婦曲) 어머니를 노래한 시, 연인들을 노래한 시는 많아도 아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