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과 사진/시 읽기

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흰구름과 함께 2023. 3. 3. 15:18

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을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마음의 수수밭』.창작과비평사. 1994)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72』(조선일보 연재, 2008)
 

 

  시가 어떻게 해서 쓰여질까. 어떤 때는 별다른 손질도 없이 몇 십분 만에 뚝딱 완성되기도 하고 또 어떤 시는 몇 개월 몇 년, 몇 십 년만에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낮설게 하기의 아름다움> 이라는 천양희 시인의 글을 보면 시인으로서 늘 깨어 있는 마음과 시를 향한 고뇌가 잘 나타나 있다. 일순 떠올랐다 사라지는 작은 시의 씨앗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지하철이든 어디든 메모지를 손에서 놓지 않으며 시와 더불어 시를 위한 준비를 늘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가 자주 와 준다면 좋겠지만 그렇지도 않거니와 설사 온다고 해도 시로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이 험난하고 지난한 시도 있다. 이 글에서 그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자신의 시 세 편을 소개하고 있다. 한 편은 어머니를 소재한 시 '그믐달' 이라는 시는 30분만에 완성을 했으나 '마음의 수수밭' 은 8년, '직소포에 들다' 는 무려 13년만에 완성을 했다고 한다. 이재무 시인은 자신의 경험으로 볼 때 잘 쓰려고 퇴고를 많이 한 시보다 어떤 느낌을 받아 한번에 쓰여진 시가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이런 고된 퇴고 과정을 거쳐서 세상에 나온 시는 적어도 오래 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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