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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의 겨울 창고 /김동호

다람쥐의 겨울 창고 김동호 다람쥐의 겨울 창고를 가보았다 도토리 99개 개암 32개 밤 17개---- 이상하다 온 산이 제 것인데 왜 그렇게만 갖다 놓았을까 나같으면 고소한 개암 300개 달콤한 밤 200개 쓰고 떪은 도토리는 0개 그렇게 갖다 놓았을 것 같은데 -월간『문학과창작』(1997년 3월호) ---------------- 청설모와 영역이 겹쳐 그 수가 점점 줄어간다는 다람쥐. 영역싸움에서 밀려서일까요. 사람들이 도토리를 주워가 먹이를 빼앗겨서일까요. 사람을 보면 도르르 도르르 도망을 가다가 돌담불에 앉아서 앞발을 들고 비비던 앙증맞은 모습을 요즘은 잘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등산을 가다가 한 번씩 마주치면 무척 반가워 얼른 디카를 들이밀어보지만 귀하신 몸이라고 사진촬영을 잘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산 인터체인지 /조병화

오산 인터체인지 조병화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燈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조히 떨어져 있고 허허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리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8』(조선일보 연재, 2008) ======================================================================= 시의 행과 연구분에 대해서 인터넷 신문에서 시를 보다 보면은 인터넷 판에 실린 시와 종이 신문에 실린 시의 행과 연 구분이 틀립니다.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떠도는 자의 노래 /신경림

떠도는 자의 노래 신경림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다시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시집『뿔』(창비, 2002) -전집『신경림 시전집 2)』(창비, 2007) ------------------------- 그대는 이 세상에 오기 전 무엇을 놓고 왔는지 기억이 나시나요. 아니면 이 세상에서 저 세..

오누이 / 김사인 -형제 /김준태

오누이 김사인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살 더 먹은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에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짝 당겨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시집『..

접신接神한다 /최금녀

접신接神한다 최금녀 이보耳報라는 말은 귀신이 사람 귀에다 대고 정보를 준다는 말인데 귀신의 소리라, 사전에도 없다 귀신 소리를 알아차리자면 접신해야 하고 접신하려면 아무래도 산의 심지 속을 파고 들어가 절벽 밑에 촛불을 밝히고 술도 치고 수백 번 수천 번 허리 굽혀야 하리라 물소리, 바람소리, 다 젖히고 쉿, 정보 들어올텐데 나무에 바위에 냇물에 스며 흐르던 유 불 선 천년의 향기 우주의 비밀이 들려올 것인데 그 신통한 정보 그게 바로 하늘이 내리는 이보耳報 필보筆報이겠다 시가 안 되는 날엔 지리산으로나 들어가 바위 아래 두 귀를 열어놓고 접십하고 이보耳報나 청해볼까 ―시집『큐피드의 독화살』(종려나무, 2007)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엄마 뱃속에 아기가 잉태하여 있다가 때가 되면 나오듯 나오는 것이라고..

카테고리 없음 2023.03.03

감꼭지에 마우스를 대고 /최금녀

감꼭지에 마우스를 대고 최금녀 내 몸에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를 따내온 흔적이 감꼭지처럼 붙어 있다 내 출생의 비밀이 저장된 아이디다 몸 중심부에 고정되어 어머니의 양수 속을 떠나온 후에는 한번도 클릭해 본 적이 없는 사이트다 사물과 나의 관계가 기우뚱거릴 때 감꼭지를 닮은 그곳에 마우스를 대고 클릭, 더블클릭을 해보고 싶다 감꼭지와 연결된 신의 영역에서 까만 눈을 반짝일 감의 씨앗들을 떠올리며 오늘도 나는 배꼽을 들여다본다 열어볼 수 없는 아이디 하나 몸에 간직하고 이 세상에 나온 나. ―계간『애지』(2004년 겨울호) 좋은 시가 무엇일까. 시를 조금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고민을 해본 화두겠지요. 그래서 저도 이런저런 시집을 사 보았습니다. 좋은 시를 찾아서 이 문학지 저 문학지를 기웃거려보기도 ..

하늘의 옷감 /W.B. 예이츠 - 진달래꽃 / 김소월

하늘의 옷감 /W.B. 예이츠 - 진달래꽃 / 김소월 내게 금빛 은빛으로 수놓아진 하늘의 옷감이 있다면 밤의 어두움과 낮의 밝음과 어스름한 빛으로 된 푸르고 희미하고 어두운 색의 옷감이 있다면 그 옷감을 그대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은 꿈밖에 없으니 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아드리오니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그대가 밟는 것은 내 꿈이기에. ㅡ김억 번역시집,『오뇌의 무도 』중에서. --------------------------- 진달래꽃 /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 없이 고이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엔 약산 그 진달래꽃을 한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발걸음마다 뿌려놓은 그 꽃을 고이나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

치워라, 꽃! /이안

치워라, 꽃! 이안 식전 산책 마치고 돌아오다가 칡잎과 찔레 가지에 친 거미줄을 보았는데요 그게 참 예술입디다 들고 있던 칡꽃 하나 아나 받아라, 향(香)이 죽인다 던져주었더니만 칡잎 뒤에 숨어 있던 쥔 양반 조르륵 내려와 보곤 다짜고짜 이런 시벌헐, 시벌헐 둘레를 단박에 오려내어 툭! 떨어뜨리고는 제 왔던 자리로 식식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식전 댓바람에 꽃놀음이 다 무어야? 일생일대 가장 큰 모욕을 당한 자의 표정으로 저의 얼굴을 동그랗게 오려내어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퉤에! 끈적한 침을 뱉어놓는 것이었습니다 ―시집『치워라, 꽃!』 (실천문학사, 2007) ------------------ 어릴 때 왕거미가 줄을 친 것을 보았다. 크기가 어느 정도냐 하면은 원모양이 1미터쯤 되는 것 같았다. 거미줄이 ..

손금 보는 밤 /이영혜

손금 보는 밤 이영혜 타고 난다는 왼 손금과 살면서 바뀐다는 오른 손금 육십갑자 돌아온다는 그가 오르내린다. 양 손에 예언서와 자서전 한 권씩 쥐고 사는 것인데 나는 펼쳐진 책도 읽지 못하는 청맹과니. 상형문자 해독하는 고고학자 같기도 하고 예언서 풀어가는 제사장 같기도 한 그가 내 손에 쥐고 있는 패를 돋보기 내려 끼고 대신 읽어준다. 나는 두 장의 손금으로 발가벗겨진다. 대나무처럼 치켜 올라간 운명선 두 줄과 멀리 휘돌아 내린 생명선. 잔금 많은 손바닥 어디쯤 맨발로 헤매던 안개 낀 진창길과 호랑가시나무 뒤엉켰던 시간 새겨져 있을까. 잠시 동행했던 그리운 발자국 풍화된 비문처럼 아직 남아 있을까. 사람 인(人)자 둘, 깊이 새겨진 오른 손과 내 천(川)자 흐르는 왼손 마주 대본다. 사람, 사람과 물줄..

나그네 /박목월

나그네 박목월 술 익은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 지훈(芝薰)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시집『청록집』(을유문화사, 1946;『박목월 시전집』.민음사. 2003)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목월에게' 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시는 시를 쪼매 읽어본 사람이면 다 알고 있다. 박두진 시인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우는 조지훈 시인이 박목월 시인에게 완화삼(玩花衫)이라는 시를 보내고 이에 화답한 시가 ’나그네’ 이다. 사람 개개인 취향과 기호에 따라 저처럼 완화삼 시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