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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화삼(玩花衫) ―목월(木月)에게 /조지훈

완화삼(玩花衫) ―목월(木月)에게 조지훈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러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상아탑》5호(1946. 4)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 나그네 박목월 (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리(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

밥 /장석주

밥 장석주 귀 떨어진 개다리 소반 위에 밥 한 그릇 받아놓고 생각한다. 사람은 왜 밥을 먹는가. 살려고 먹는다면 왜 사는가. 한 그릇의 더운 밥을 먹기 위하여 나는 몇 번이나 죄를 짓고 몇 번이나 자신을 속였는가. 밥 한 그릇의 사슬에 매달려 있는 목숨 나는 굽히고 싶지 않은 머리를 조아리고 마음에 없는 말을 지껄이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발을 들여 놓고 잡고 싶지 않은 손을 잡고 정작 해야 할 말을 숨겼으며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했으며 잡고 싶은 손을 잡지 못했다. 나는 왜 밥을 먹는가, 오늘 다시 생각하며 내가 마땅히 했어야 할 양심의 말들을 파기하고 또는 목구멍 속에 가두고 그 대가로 받았던 몇 번의 끼니에 대하여 부끄러워 한다. 밥 한 그릇 앞에 놓고, 아아 나는 가롯 유다가 되지 않기 위하여 ..

몸바쳐 밥을 사는 사람 내력 한마당/고정희

밥과 자본주의 몸바쳐 밥을 사는 사람 내력 한마당/고정희 (쑥대머리 장단이 한바탕 지나간 뒤 육십대 여자 나와 아니리조로 사설) 구멍 팔아 밥을 사는 여자 내력 한 대목 조선 여자 환갑이믄 세상에 무서운 것 없는 나이라지만 내가 오늘날 어떤 여자간디 이 풍진 세상에 나와서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똥배짱으루 사설 한 대목 늘어놓는가 연유를 묻거든 세상이 묻는 말에 대답할 것 없는 여자, 그러나 세상이 묻는 말에 대답할 것 없는 팔자치고 진짜 할 말 없는 인생 못 봤어 내가 바로 그런 여자여 대저 그런 여자란 어뜬 팔자더냐(장고, 쿵떡) 팔자 중에 상기박한 팔자를 타고나서 부친 얼굴이 왜놈인지 뙤놈인지 로스케인지 국적 없는 난리통 탯줄 잡은 인생이요 콩 보리를 분별하고 철든 그날부터 가정훈짐* 부모훈짐..

초록 나비 /김연화

초록 나비 김연화 꽃들 잔칫상 물린 자리 오월 끝자락 잎들의 세상은 사람만 두고 모두 초록이다 잎사귀의 꿈이 나비가 되었을까 초록 날개 저어 봄을 건너온 유월 금오산 기슭에서 본다 표본실에서도 본 적 없는 초록 나비 눈부시지 않아서 더욱 아름다운 봄꽃 떠난 세상을 온통 휘젓는 초록의 날갯짓이 평온하다 ㅡ시집『초록 나비』(천년의시작, 2019) ----------- 금오산은 어디에 있는 산이며 어떤 유래를 가지고 있을까. 서울 수도권을 둘러싸고 있는 북한산국립공원인 북한산, 도봉산, 사패산을 마주하고 있는 수락산과 불암산 그리고 관악산과 삼성산을 제 영역 순찰하듯 골목길을 맴돌고 있는 길냥이처럼 사계절 7개 산을 돌고 도는 나에겐 금오산은 낯선 산이다. 찾아보니 금오산은 977m로 북한산 최고봉 백운대 8..

아주 텅 빌 때까지, 장미 /조선의

아주 텅 빌 때까지, 장미 조선의 돌과 바람과 직립의 돌담과 햇빛 그 환한 속 향기까지 삼켜내는 마음 이 모든 것들의 안간힘이 허공에서 출렁거린다 색에서 색을 빼거나 더해서 눈물 한 솥 끓여내듯 절정의 아름다움이 처음 간망했던 기도와 같을 때 애끓는 사람의 가슴속에서도 장미꽃은 핀다 밤과 낮을 무시로 건너기 위해 가시에 찔려 생인손 앓을 때 사랑과 이별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가시에 박힌 상처의 깊이만큼이나 세상일에 숨이 턱턱 막혔다 생애 굽이친 무수한 비명처럼 발꿈치 닿는 곳마다 빈 마음을 들키고 말았다 휘어지는 가지 끝에 매달렸지만 누구보다도 먼저 당신 가슴에 닿기를 원했다 까닭모를 외로움에 한껏 발을 세우고 화르르 불이 붙는 곳 아주 텅 빌 때까지 내어지는 한 생애 눈으로 보거나 코로 맡거나 귀로 듣..

감자꽃 /이재무

감자꽃 이재무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피어 더욱 서러운 女子 자주색 고름 물어뜯으며 눈으로 웃고 마음으론 울고 있구나 향기는, 저 건너 마을 장다리꽃 만나고 온 건달 같은 바람에게 다 앗겨버리고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비탈 오지에 서서 해종일 누구를 기다리는가 세상의 모든 꽃들 생산에 저리 분주하고 눈부신 생의 환희 앓고 있는데 불임의 女子, 내 길고긴 여정의 모퉁이에서 때묻은 발목 잡고 퍼런 젊음이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내 女子, 노을 속 찬란한 비애여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피어 더욱 서러운 女子 -시집『위대한 식사』(세계사. 2002) 감자는 밀과 벼, 옥수수와 함께 세계 4대 작물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약 7천 년 전 페루 남부에서 재배를 시작했고 남미 원주민들에게 주식이었다고 한..

핸드폰 /한혜영

핸드폰 한혜영 핸드폰 한 대씩은 새들도 갖고 있지. 지붕 위 새 한 마리 어딘가로 전화 걸면 그 소식 반갑게 받은 짝궁 하나 날아오고. 어쩌면 새가 먼저 핸드폰을 썼을 거야. 전화선도 필요 없고 수화기도 필요 없고 저 하늘 푸른 숫자판 부리 하나면 간단한 걸. 삐룩삐룩 여보세요 또로로롱 사랑해요. 우리 동네 아침 시간 혼선되는 새소리들 그래도 끼리끼리는 척척 듣고 통화하네. '핸드폰 한 대씩은 새들도 갖고 있지...어쩌면 새가 먼저 핸드폰을 썼을 거야...삐룩삐룩 여보세요 또로로롱 사랑해요'........착상도 기발하고 감각적인 의성어도 재밌습니다. 한혜영 시인의 홈에 가 보았더니 시 뿐 아니라 소설, 동화, 꽁뜨, 시조, 동시조 등 각 장르의 글을 다 쓰는 다 방면의 작가더군요. 핸드폰 이라는 동시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