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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김미선

매미 김미선 구애의 노래는 울음에 가깝다 백일홍 붉은 가지에 스치는 저 소리 백중이 머잖은 길에 영혼의 절규로 들리네 파도 타듯 너울거리는 저 소리의 뒤안길 느티나무에 벗어놓고 간 헌 옷 한 벌 몸이 빠져나간 뒤 바람에 날아갈 듯 깃발로 흔들리는 텅 빈 손 ―시집『바위의 꿈』(시와반시, 2022) --------------------------- 매미는 종에 따라 짧게는 3년 5년 7년 13년을 애벌레로 땅속에서 나무뿌리의 액을 먹고 살다가 지상에 나와 약 한 달간 머무르다 생을 마친다고 한다. 매미가 이렇게 주기로 나오는 것은 새, 다람쥐, 거북, 두꺼비, 거미, 고양이, 개 심지어 물고기까지 매미를 잡아먹는 천적에 대응하기 위한 생존전략의 방식이라고 한다. 미국 동부지역에는 17년을 주기로 나타타는 ..

산수유 그 여자 /홍해리

산수유 그 여자 홍해리 눈부신 금빛으로 피어나는 누이야 네가 그리워 봄이 왔다 저 하늘로부터 이 땅에까지 푸르름이 짙어 어질머리 나고 대지가 시들시들 시들마를 때 너의 사랑은 빨갛게 익어 조롱조롱 매달렸나니 흰눈이 온통 여백을 빛나는 한겨울, 너는 늙으신 어머니의 마른 젖꼭지 아아, 머지않아 봄은 또 오고 있것다. ―월간『우리詩』(2022, 5월호) ------------------------- 산수유꽃과 생강나무꽃은 비슷하다. 진달래보다도 더 일찍 피는 눈 속의 매화나 동백 말고는 초봄에 가장 먼저 피우는 것도 같다. 그러나 비슷하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왜냐하면 산수유꽃, 생강나무꽃은 우선 색깔이 노랗고 멀리서 보면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산에서는 산수유를 볼 수가 없고 생강나무는 깊은 산..

도시가 키운 섬―감천마을 /최삼용

도시가 키운 섬 ―감천마을 최삼용 비탈길 뒤뚱이며 기어 오른 마을버스에서 내려 까마득한 돌계단을 터벅터벅 오르면 마주 오는 사람 비켜가기 위해 잠시 된숨 놓아도 되는 그래서 노곤이 땟물처럼 쩔어진 골목은 이웃집 형광등 불빛까지 남루가 고인 저녁을 달랜다 액땜인 양 보낸 하루로 얻어진 고단을 눕이려 정처에 들면 허기를 부은 양은냄비의 끓는 물속에서 울혈 닮은 라면 스프 물 붉게 우러나고 몸집 부푼 면발 따라 가난의 죄까지 부풀린다 하느님과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서 살기에 믿음 약해도 하느님을 빨리 만날 것 같은 도시가 키운 섬 거기에 가난과 실패를 혹은 죄 없는 꿈을 혀끝에 단 채 휘황한 도심 발치에 두고 가난을 품앗이한 우리가 산다 ―시집『그날 만난 봄 바다』(그루, 2022) 홀로 산행을 하며 삼각산..

메주콩 삶는 날 /고재종

메주콩 삶는 날 고재종 하루 종일을 메주콩 삶는 날이라면 좋겠지요. 가마솥 가득 이글이글 장작불 메워, 너와 나는 날콩 내 나는 신경전도 삶았 으면 좋겠지요. 좀먹은 여투리콩 같은 나날도 삶고, 굵디굵은 눈물콩도 푹푹 삶았으면 좋겠지요. 한번 어긋나니 노상 빗나 가는 정분일랑은, 삶은 콩과 함께 절구에 찧고 찧어 철석같이 메주로 다지고, 서로의 가슴에 피던 세월의 곰팡일랑은, 주렁 주렁 메주 매달며 메주 잘 뜨기를 비는 데 넣겠지요. 그러고는 밤 되어 쩔쩔 끓는 아랫목에서 까짓것 등짝 좀 데면 어째, 엉덩 짝 좀 데면 어째, 마음마저 달구어져선 낮참에 치던 절구질 야 밤까지 치노라면, 어디선가 오우우 오우우 암여우 울음도 드 높겠지요. 그러다간, 그러다간, 아무래도 문창이 희끗희끗하 여선 화들짝 열어 젖..

추석 무렵 /김남주

추석 무렵 김남주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덩이로 하지?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 ―시집『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창비, 1995) 시로써 부조리한 현실을 바꿀 수가 있을까. 그것을 믿는 시인들이 있었다. 김남주 시인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노동과 혁명, 자유를 향한 시인들은 감옥도 불사하고 온몸으로 부딪치며 저항을 했었다..

각별한 사람 /김명인

각별한 사람 김명인 그가 묻는다, “저를 기억하시겠어요?” 언제쯤 박음질된 안면일까, 희미하던 눈코입이 실밥처럼 매만져진다 무심코 넘겨 버린 무수한 현재들, 그 갈피에 그가 접혀 있다 해도 생생한 건 엎질러 놓은 숙맥(菽麥)이다 중심에서 기슭으로 번져가는 어느 주름에 저 사람은 나를 접었을까? 떠오르지 않아서 밋밋한 얼굴로 곰곰이 각별해지는 한 사람이 앞에 서 있다 ―시집『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민음사, 2015) 모임에서나 길을 길가다 잘 모르는 사람이 아는 체를 하면 어떨까. 언제 어떤 인연으로 잠시 만나 뜻없이 헤어졌는지 모르지만 시에서처럼 무수한 현재들 속에 무심히 접혀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인연 속에 어느 한 부분 특별히 접혀지지 않는 기억이라 난처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자신에게 ..

나무들은 그 몸속에 사다리를 갖고 있다 /배종영

나무들은 그 몸속에 사다리를 갖고 있다 배종영 그동안 마음 주었던 나무들이 눈앞에서 자라는 순간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나무들은 겉으로는 그냥 쑥쑥 자라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몸속 물관의 기둥에 비슴듬히 사다리를 받쳐두고 가지의 저 끝 연둣빛 햇순들을 차례로 올려보내는 것이다. 그 햇순을 흔드는 높은 바람도 사실은 나무 속 사다리를 얻어 타고 올라간 것이다. 심지어 꽃들도 씨앗들도 살금살금 사다리를 기어오른 것들이다. 특이한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오른다는 것이며 오르고 나면 사다리를 치워버린다는 것이다. 나무들이 사방에 가지를 걸쳐두는 것도 바쁜 나무의 속을 배려해 겉에다 그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봐라, 내 눈에 들키고 만 낙화하는 이파리들은 사다리가 없어 뛰어내리는 중이다...

충영(蟲癭) /김성신

충영(蟲癭) 김성신 나는 한 마리 벌레 저 단단한 씨방 속이 궁금했다 그림자는 기꺼이 버려두며 빛의 모서리는 둥글게 둥글게 바라볼 때마다 나지막이 반짝일 것 견딜 수 있냐고 묻고는 사라진 웃음을 수막새로 만들며 모질다고 낯도 참 두껍다고 말할 것 내가 깊은 그곳을 헤집은 후 푸른 저녁은 말을 걸어오곤 했다 하룻밤은 당신과 입술이 맞닿는 일 사흘 밤은 당신의 어깨를 감싸는 일 이레째, 당신의 봉분을 쌓을 수도 있겠다 사소한 일들로 벌어진 당신과의 틈새로 낯선 계절이 웅크리고 있었다 앞에서 안아도 가슴은 늘 뒤 몸 안으로 흐르는 채워지지 않는 생각을 갉을 수밖에 없는 운명 나를 저 멀리로 내려놓아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들은 죄다 길이 되고 안녕, 이라는 말 한마디 무릎으로 구겨 넣을 때마다 가뭇한 소리가 이명..

디오게네스의 세상 /이석구

디오게네스의 세상 이석구 알렉산드로스여 당신이 천하를 얻었다 한들 자족의 디오게네스 삶만큼 행복했겠소 비릿한 피 냄새 풍기며 제 것도 아닌 것을 마구 빼앗고 그래도 성에 차지 않던 당신의 세상은 끝이 닿지 않는 부처님 손바닥이었던 것을 무력으로 정복은 왜 하는 것인지 돕는 공존의 세상을 꿈꾸며 사람마다 하나의 세상을 가슴에 가꾸거늘 어찌 그 세상이 피 냄새 가득한 전쟁터겠소 이미 한 줄기 빛으로도 충분한 그런 자족을 품은 순수한 마음 가진 것에 족하고 나눌 수 있다면 더욱 행복할 평화 소박한 그 디오게네스의 세상 아니겠소 ―시집『흐뭇한 삶』 (천년의 시작, 2022) 아주 오래전 책을 머리맡에 두고 잠을 자고 눈을 뜬 적이 있었다. 샘터, 미소 유머어 같은 생활의 지혜나 경구, 삶의 웃음과 여유를 주는 ..

아욱국 냄새는 창문을 넘고―달팽이 /박재숙

아욱국 냄새는 창문을 넘고 ―달팽이 박재숙 꿈에 본 그 녀석일까? 6일간 냉장고 야채실 아욱 담은 비닐봉지 속에서 살아남은 달팽이 한 마리 저 느린 걸음으로 얼마나 아욱 줄기를 헤맸던 것일까? 없애야지 싶다가도 텃밭 야채 걱정되어도 먹으면 얼마나 먹을까 생각에 화단에서 꽃향기 맡으며 소풍처럼 남은 생 더 살다 가라고 창문 열고 꽃기린 잎새에 놓아주었는데 장맛비 온종일 뿔을 적시고 저녁이 되어도 집 한 채 둘러메고 그 자리 떠나지 않고 있다 어디로 가다가 문득 여기까지 따라왔을까? 먼 천둥소리 아욱국 냄새는 창문을 넘고 오솔길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ㅡ시사진집『천 년쯤 견디어 비로소 눈부신』(詩와에세이, 2022) 언젠가 상추를 먹다가 달팽이와 마주한 적이 있었다. 아는 사람이 시골에서 뽑아왔다고 주었는데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