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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방 /이은경

고양이의 방 이은경 그 방에는 밖이 궁금한 고양이가 산다 털이 부드러워 공기로 떠다니는 위험한 고양이 목소리는 너무 작아 목울대에 멈춰있는 치즈 빛깔 소유할 수 없는 그리움의 고양이 한 마리 모래를 만나면 영역을 표시하는 사막에서 쫓겨난, 사막을 그리워하는 종족 별빛 내리는 창가를 보며 높은 곳만 오르는 습성 창을 열면 까마득한 허공 문밖이 그립다고 뛰어내릴 수도 없는데 오직 혼자만의 세상이 당연한 고양이의 고립 어제도 오늘인, 오늘도 내일인 고양이의 숨소리 방황이 두려운 길고양이는 길들여진 유전자를 숨기고 날카로운 발톱을 거세하고 들판의 자유도 감금한 깊은 우물처럼 조용한 그 방에서 사각사각 들리는 저 소리는 자라나는 야성인가 오늘 밤 탈출보다 푸른 언덕을 그리워하며 어둠을 엿보는 한 마리 고양이 고양..

일인칭의 봄 /이명숙

일인칭의 봄 이명숙 꽃이 피겠다는데 막을 수 있겠어요 아까시꽃 찔레꽃 아직 피우지 못한 언어는, 어느 먼 생의 입술에서 필까요 꽃들 망막에 꽂힌 흰빛 푸른빛 사이 서로 다른 오늘의 왼눈 오른눈 사이 간 봄의 볕에 타버린 혀의 뿌리 찾아서 꽃이 지겠다는데 막을 수 있겠어요 검은 숲에 버려져 스마트만 진심인 우리는, 어느 천년 후 여기 다시 올까요 불두화 합장하는 그렇고 그런 봄날 귀 적시는 소리에 그저 우연이란 듯 서운암 꽃자리마다 술렁이는 눈빛들 ㅡ부산시조 통권 50호 기념시조집 『서운암, 시조에 물들다』(부산시조시인협회, 2021) ㅡ시조집『튤립의 갈피마다 고백이』(문학들, 2022) ----------------------- 시의 제목이 일인칭의 봄이다, 이인칭도 있고 삼인칭도 있는데 왜 하필 일인칭..

삼류 /이이화

삼류 이이화 칼바람 한 귀퉁이 꺾어 오랜 동반자 삼아 어깨에 메고 지난밤 잠시 말아 두었던 길을 새벽어둠 속에 펼쳐 놓는다 찢겨진 잠에서 뛰어나온 코딱지만 한 점포가 달려와 하루치 셋값을 선금으로 계산하느라 분주해지면 동대문 어느 여공의 거친 손을 쓰다듬다가 박음질로 달려온 시장표라는 이름의 옷이 보푸라기꽃 피워 낼 주인공을 기다린다 비쌀수록 없어서 못 판다는 백화점 명품관에서 클래식 음악이 고상하게 일류 고객을 위해 목청을 높이는 동안 시장 바닥의 질척한 삶은 더 깊은 언더그라운드 속에 갇히곤 한다 학습된 유산도 변변한 취향도 정착하지 못해 빈 가지처럼 마구 흔들리는 날 소주 한 병과 안주로 곁들인 뽕짝 가가 한 구절에 입맛이 돌아 마시고 또 마시던 하급의 노래들 찾아오는 단골손님의 얇은 지갑마다 걱정..

사랑의 묘약 /박성규

사랑의 묘약 박성규 믹스커피를 탄다 늘 해오던 일이라 근골격계에 걸리지 않게 능수능란하게 커피를 탄다 어떤 날은 맛이 있고 어떤 날은 떨떠름한 맛이 난다 같은 물이고 같은 커피인데 맛이 다른 이유는 모른다 어제도 그랬다 온도가 맞지 않아서 그랬을까 커피 맛이 입 안에서 뱅뱅 돌기에 소주 한 방울 떨어뜨렸더니 금방 커피 맛이 사르르 돌아왔다 카푸치노보다 더 부드러웠다 혼자 마시기도 아깝다 같이 마실 사람 없소? ―시집 『내일 아침 해가 뜨거나 말거나』 (2021, 문학의전당) 제법 많은 봄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지난주도 내렸고 지지난 주 일요일에도 비가 내렸다. 일요일 산벚꽃 뵈러 가려는데 또 비가 온다고 하네. 그래 하늘이 내리는 비는 내가 어찌할 수 없고 이 빗소리 들으면서 나도 커피를 한 잔 마셔야겠..

카테고리 없음 2023.03.17

칸나가 피는 오후 /이이화

칸나가 피는 오후 이이화 하늘거리는 연분홍 블라우스 여미면서 봄날이 떠나간 도로 한 귀퉁이 수다쟁이 여름 붙들어 세워 두고 여자가 도착했다 늘씬한 큰 키에 걸친 푸른 원피스 자락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차창 밖으로 휘파람 날리는 사내들 눈빛이 위태롭다 한 올 한 올 짜내려 간 노른자 같은 시간들이 너무 느슨하거나 너무 팽팽하게 당겨지는지 새빨간 립스틱만 자꾸 덧칠하고 서 있는 여자 계절은 지나온 시절을 복사하다가 붉은색 잉크를 엎질러 체감온도 급상승을 찍고 있는데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한낮 타는 목 길게 빼고 싼 티 나는 웃음 치대며 여름을 팔고 있는 그 여자 칸나 ―시집『칸나가 피는 오후』(그루, 2021) ------------------- 여름만 되면 칸나가 눈에 밟힌다. 저한테 아무 빚진 것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