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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대상 포진 /박숙경

흔적 ―대상포진 박숙경 압축된 잠복기가 풀리면서 꽃의 비명이 바람에 실려 왔다 저, 출처 불분명의 레드카드 낯선 내가 뾰족이 돋았다 자정 부근에서야 어둠의 모서리에 오른쪽의 통증을 앉힌다 낡은 자명종 소리가 명쾌하게 번지면 조각난 봄의 퍼즐이 방안 가득 흩어지고 나는 다시, 나를 앓는다 칼날 같이 깊은 밤 공복의 위장이 허기를 바깥으로 출력하면 소원은 자주 초라해지고 미완의 날개는 천칭자리와 사수자리 사이쯤에 엉거주춤, 지독한 사랑은 오른쪽 등에서 태어나 겨드랑이를 가로질러 명치끝에서 머문다 ㅡ시집『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시인동네, 2021) 대상포진의 초기 증상은 감기와 비슷하다고 한다. 두통이 오고 몸살 난 것처럼 팔, 다리가 나른하고 쑤신다고 한다. 건강할 때는 숨어 있다가 피로가 쌓이거..

아버지의 들녘 /안규례

아버지의 들녘 안규례 어쩌까 어쩌실까 구순의 울 아부지 올해도 또 손수 지으신 농산물 보내셨네 이 폭염 이 염천에 구부러진 허리로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거친 손 눈에 보이네 해마다 올해만 올해만 하시더니 이러다가 내 손 대신 일손 잡고 돌아가시것네 젊은 날엔 탄광에서 석탄 가루 반찬 삼아 드시고 환갑이 지난 자식 지금도 품고 계시네 복중 뙤약볕 피한다고 새벽이슬 밟으며 풀 뽑고 거름 놓아 길러 땄을 옥수수, 감자, 콩, 검은 봉지에 10남매 얼굴도 같이 넣어 봉다리 봉다리 꽁꽁 잘도 싸매셨네 예나 지금이나 야물딱진 울 아버지! ―시집『눈물, 혹은 노래』(도서출판 청어, 2021) ---------------- 고향과 사랑과 어머니는 시의 진부한 소재가 된 지 이미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시인..

눈 온 날 저녁 /박창기

눈 온 날 저녁 박창기 이웃 일 도우러 갔던 아내가 무서울까 봐 늦게 오는 가로등 불빛 대신 마중 나간다 오늘은 예정에 없던 과메기를 깐 덕으로 반주 안주로 안성맞춤이라 여겼는데 촉촉한 꼬리 부분은 잘 먹는다 미용에 좋다고 건강에 좋다고 그리 꼬셨건만 꼬들한 꼬리 부분 외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쌈 싸서 잘 먹는다 허락된 소주 두 잔으로 잉여 과메기를 처리하기엔 그렇고 해서 눈치를 본다 따뜻한 눈빛을 얹어 바라보면 혹여 보시라도 있을까 기대해 보는 것이다 이따금 배려를 받는 날은 불콰한 술맛이 두 배로 늘어난다 아내의 대단한 선심에 나는 그만 흐뭇해져 ‘나 무엇이 될꼬하니’ 라는 풍류로 응답한다 나를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하려고 애쓰는 아내의 관심 이승에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더 열심히 더 사랑해야겠다는..

경전 1 /이태호

경전 1 이태호 언젠가 난 어렵사리 맹자 7편을 읽었고 지금은 갈피 닳은 '아내'를 읽는 중이네 필생을 두고 다 못 읽은 책이 또 있네 '어머니' ㅡ시조집「달빛 씨알을 품다」(청어, 2022) 우리 어머니는 딸을 낳지 못하고 아들만 셋을 두었는데 그래서 내가 나서 자라던 우리 집에서는 여자라고는 엄마밖에 없었다. 집안에서 여자의 정취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다 보니 여자는 내게 있어 늘 머나먼 미지의 세계처럼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먼 동산에 피어오르는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보이기는 보이나 만질 수는 없었고 가까이는 가보고 싶은데 가까이할 수도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그저 맘속 깊이 간직한 보석처럼 여자란, 여신처럼 신성하고 신비한 존재여서 함부로 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꽃에서 사는 어여쁜 요정처럼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