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과 사진/시 읽기

일인칭의 봄 /이명숙

흰구름과 함께 2023. 3. 17. 08:28

일인칭의 봄

 

이명숙

 

 

꽃이 피겠다는데 막을 수 있겠어요

아까시꽃 찔레꽃 아직 피우지 못한

언어는, 어느 먼 생의 입술에서 필까요

 

꽃들 망막에 꽂힌 흰빛 푸른빛 사이 서로 다른 오늘의

왼눈 오른눈 사이

간 봄의 볕에 타버린 혀의 뿌리 찾아서

 

꽃이 지겠다는데 막을 수 있겠어요

검은 숲에 버려져 스마트만 진심인

우리는, 어느 천년 후 여기 다시 올까요

 

불두화 합장하는 그렇고 그런 봄날 귀 적시는 소리에

그저 우연이란 듯

서운암 꽃자리마다 술렁이는 눈빛들

 

 

 

ㅡ부산시조 통권 50호 기념시조집 『서운암, 시조에 물들다』(부산시조시인협회, 2021)

ㅡ시조집『튤립의 갈피마다 고백이』(문학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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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제목이 일인칭의 봄이다, 이인칭도 있고 삼인칭도 있는데 왜 하필 일인칭의 봄일까. 제목이 그럴싸해서 눈길을 사로잡는데 꽃이 지는 게 꽃의 자살이라면 어느 인칭의 계절에 지는 꽃이 심쿵할까.

 

  시의 이미지 전환이 폭포에 물 떨어지듯 이루어지고 있어 누군가의 가슴에 들어가 조각난 언어의 파편처럼 주워 담기 어렵다. 그런데 시는 첫 행부터 저항적이다. 꽃이 핀다는데 막을 수 있겠어요 가 아니라 꽃이 피겠다는데 막을 수 있겠냐고 한다. 막무가내 도발적이다. 아니 역으로 순응적이라고나 할까. 그러다가 돌연 꽃이 진다는데 막을 수 있겠어요 가 아니고 꽃이 지겠다는데 막을 수 있겠냐고 한다. 이 또한 도발이고 저항이며 순응이다. 도발이고 저항이고 순응인데 화나거나 떨떠름하지 않다. 피겠다는데 지겠다는데 그 순응의 의지를 누가 막을 수 있으랴.

 

  하지만 글쎄, 글쎄다. 한번 진 꽃이 언제 올까. 다시 오기는 오는 걸까. 지는 꽃은 알 수 있을까. 백년 후 천년 후 다시 온대도 순환의 윤회 생성 속에서 무엇을 집착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모르지만 꽃은 알고 있을 것이다, 꽃이 꽃을 피우는 것도 지우는 것도 즐거운 고통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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