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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길목에서 5―임신 5

생활의 길목에서 5 ―임신 5 셋째를 가진 아내의 모습은 정말 첫 아이와 둘째 아이 때와는 달리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손과 발이 부어오르더니 부종이 점점 심해져 이제는 얼굴까지 눈에 띄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문득 둘째 애를 가졌을 때가 생각이 났다. 그때도 한 번 경험이 주는 무딤 때문에 다달이 병원에 가지를 않고 있다가 아이가 거꾸로 서 있는 바람에 멀쩡한 배에다 칼을 대서 둘째를 얻어야 했던 호된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 첫 번째 임신 때는 첫 임신이라 모르는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아 또 겁이 나서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또박또박 다니며 의사의 지시에 충실히 따른 덕분에 가정집 분위기가 느껴지는 동네의 산부인과에서도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자연분만을 했었는데 둘째 때는 그렇지를 못했다. 임신 사실..

생활의 길목에서 4―임신 4

생활의 길목에서 4 ―임신 4 아내가 족발을 그렇게 먹고 싶어 했지만 사주지 못했던 이유는 아주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내가 족발에 대해서 상당히 안 좋은 이미지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서 족발을 한 번도 먹어 본 적은 없었지만 만드는 과정을 많이 본 적은 있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직장은 동대문운동장 뒤편에 있는 신당동 시장 근처에 있었다. 그래서 항상 시장을 지나가야 했는데 거기에는 언제나 머리 고기와 족발을 팔고 있었는데 족발 만드는 과정이 영 위생적이지 않아서 모든 족발을 저렇게 만드는 줄 알았다. 시장 건물 옥상에서 돼지 발을 잔뜩 쏟아 부어 놓고는 부탄가스로 돼지 다리 털을 그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주위 환경이 상태가 지저분하고 아주 더러웠다. 게다가 무슨 기름인지..

생활의 길목에서 3―임신 3

생활의 길목에서 3 ―임신 3 지금은 다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갔지만 중학생이던 둘째 아이의 이야기인데 딸아이를 키우다 보면 재미있는 일도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 나만이 알고 있는 민망한 목욕탕 사건도 하나 있었다. 그 전과는 달리 요즘은 목욕탕에 가보면 아주 가끔 여자애를 데리고 남탕에 오는 자상한? 아빠가 어쩌다 보이는데 우리 딸애들이 돌 미만까지 매번 목욕탕에 갈 때마다 내가 데리고 다녔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는 추억이기도 하지만 지금 같으면 딸아이를 데리고 남탕에 데리고 갈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딸애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자주 갔었다. 한 번은 둘 째 아이가 탕 안에 서서 공을 물에 담갔다 건졌다 하면서 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활의 길목에서 2―임신 2

생활의 길목에서 2 ―임신 2 그 뒤 아들에 대한 아무런 욕심도 없었다. 시택이나 처가댁 주변에서 아들 없다고 해서 구박 주는 사람도 없었고 어쩌다 명절 때 한두 번 가는 고향에서 아버지로부터 딸자식은 다 쓸모없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지만 그 누구도 우리에게 아들에 대한 스트레스를 주지도 않았고 강요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간혹 누가 딸딸이 아빠라고 하면 듣기는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화낼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동네에서 장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아들 낳는 비법? 을 귀동냥으로 들을 수는 있었다. 어떤 말은 정말 황당무계하고 미신 같은 말도 있지만 여성의 체질이 산성화되어 있으면 딸 낳을 확률이 높다는 말은 신빙성이 있었다. 여자가 산성으로 된 음식을 먹고 반대로 남자가 알칼리성음식..

꽃 피는 봄날―2018 동생을 보내며

꽃 피는 봄날 ―2018 동생을 보내며 정호순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구나 산벚꽃 라일락꽃 사방에 지천인데 네 모습 어느 꽃 속의 벌처럼 숨었느냐 도망가고 싶다더니 어디로 숨고 싶다더니 아픔이 없는 곳 무서움 없는 곳으로 아무도 찾지 못하게 아주 꽁꽁 숨었구나 형, 형 부르던 수화기 목소리 귀에 젖고 잊었다가 생각이 나 눈물이 흐르는데 그리운 그 아픈 마음 누구에게 말할까 더 한번 보고 싶고 다시 못 봐 안타깝고 마지막 밥 한 끼 못 나눠서 미안하고 소소한 하찮은 고통 아픔으로 남는데 천둥 번개 몰아치며 장맛비 쏟아진다 전생 있어 우리가 현세에 만났다면 내생에 한 번 더 다시 형제로 보자꾸나 ―계간『詩하늘 107』(2022년 가을호)

꽃 피고 새가 울고ㅡ외손녀 하윤이에게

꽃 피고 새가 울고 ㅡ외손녀 하윤이에게 정호순 톡, 톡, 톡... 들뜬 마음에 풋잠 든 신새벽 누군가 내 잠을 깨우는 창문 두드리는 소리 초아의 살랑거리는 바람처럼 네가 왔구나 돌돌돌 노래하는 산골짜기 시냇물처럼 그렇게 왔을 거야 우리는 모두 네가 오기를 오래전 약속처럼 기다렸단다 어떤 꽃일까 어떤 새일까 참으로 궁금했지 살포시 감은 눈엔 꽃잎이 열리고 꽉 쥔 주먹은 잘 여문 도토리 한 알 찡그리던 미간이 펴지며 댁대구르르 배냇짓 웃음소리 꿈꾸듯 칭얼거리면 지나가는 솔바람도 걸음을 멈추고 다보록한 머리카락 진한 속눈썹 폴락폴락 날갯짓하는 나비가 앉아 차안의 세상만사 네가 와서 새 울고 꽃이 피고 웃음꽃 피는구나 ―계간『詩하늘 106』(2022년 여름호)

카테고리 없음 2023.02.21

광속구 ―2020~2021 봄

광속구 ―2020~2021 봄 정호순 새순이 움트기도 전 새봄은 몹쓸 꿈으로 지구촌을 덮쳐 왔다 정체불명의 미사일 삽시간에 대한민국 세계 곳곳, 지구촌을 점령했다 어느 전쟁이 이보다 속전속결이었던가 병사의 군홧발로는 밟을 수 없는 속사포 총알보다 빠른 광속으로 지구의 한 도시 도시를 농무처럼 장악하기 시작했다 냄새도 형태도 없는, 맛도 생각도 이데올로기 이념도 없는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는 저격과 무차별 포격만 있을 뿐 폐가의 뜬소문처럼 괴담이 흉흉하다 만지지 마라, 붙지 마라 누구도 어느 곳도 안전지대가 없는 너도나도 표적이 되고 과녁이 될 수 있는 지금 단순 타박상도 한 번 맞으면 족히 보름을 간다는 저 괴물 투수의 광속구 3루도 2루도 1루도 피난처가 될 수 없는, 홈으로 도루하는 포수의 마지노선..

소방관을 위하여―평택 물류 창고화재로 순직한 3명의 소방관을 기리며

소방관을 위하여 ―평택 물류 창고화재로 순직한 3명의 소방관을 기리며 정호순 봉사라는 이름을 섬기며 살았나이다 불이라는 이름을 새기며 살았나이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자 화마로 달려드는 우리는 누군가의 귀하디 귀한 자식이며 누구의 자상한 아버지요 띠앗의 형제이며 퇴근하면 만나는 평범한 이웃이며 친구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저에게 두려움을 없게 해주시고 화구로 뛰어드는 저에게 한치의 망설임이 없도록 용기를 주옵소서 화재현장의 희미한 소리라도 들을 수 있도록 예민한 청각을 주시옵고 어둠 속에서도 톺아볼 수 있는 밝은 눈을 주시옵소서 불길을 잡으려고 화마에 맞서는 저에게 무모함이 아니란 걸 깨닫게 하옵시고 소방관이라는 그 소중한 이름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하냥 톺아보게 하옵..

북한산 연가(戀歌) 1

북한산 연가(戀歌) 1 정호순 1, ―백운대 지난밤 비바람 몹시 불고 천둥 번개 요란했는데 아무 탈 없이 잘 있는지요 비 내리는 지지난 봄엔 진달래능선으로 올랐다가 지난가을은 단풍 고운 하루재 고갯길로 올랐다가 눈 내리는 오늘은 북한산성 대서문 골짜기로 당신을 뵈러 갑니다 풍경에 들면 풍경의 모습이 보이지 않듯 산에 들면 산의 모습을 볼 수 없어 늘 내 속에 있는 당신 당신 품에 안기면 당신이 보이질 아니하고 당신 품에 있어도 당신을 못 찾아 산을 올라도 산을 내려와도 나는 늘 당신이 그립습니다 2. ―인수봉 당신은 내게 있어 언제나 멀고 먼 당신이지요 그러나 당신이 늘 거기에 그대로 계시기에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다 3. ―만경봉 아름다워라 만경대! 무슨 말 더 필요할까..

가을의 길목에서

가을의 길목에서 정호순 가을날 다람쥐 도토리 모으듯 시를 써서 야금야금 땅에 묻는 사람이 있었네 아는 이 알아주는 이 없이 아무도 모르게 홀로 쓰고 지웠네 자신의 블로그 프로필에 "바람도 없이 떨어지는 꽃잎같이 없어질 글을 쓰는 여자" 라고 자괴감이 우수에 젖어 늦은비 내리는데 병원에 입원한다는 짧은 쪽지 한 장 달랑 던지고 만추의 낙엽처럼 홀연히 사라진 사람 바람처럼 눈처럼 시라는 이름으로 몇 번의 쪽지를 주고받은 색깔도 음색도 알 수 없는 사람 떨어진 꽃잎처럼 땅에 스며든 빗물처럼 멈춰진 공간 속에 정지되어있는 사람 몇 년의 세월이 흐르고 또 한 해가 지나가는 이 가을 문득 생각나 탐문을 하기도 했었는데 지리산 골짝 어디쯤 요양중이라 했는데 홀로 낯선 곳 먼 여행을 떠났다 온 것처럼 아무 일 없었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