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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는 울어야 한다 /이문재

뻐꾸기는 울어야 한다 이문재 초록에 겨워 거품 물까 봐 지쳐 잠들까 봐 때까치며 지빠귀 혹여 알 품지 않을까 봐 뻐꾸기 운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은 뻐꾸기가 할 일은 할 수 있는 일은 울음으로 뉘우치는 일 멀리서 울음소리로 알을 품는 일 뻐꾸기 운다 젊은 어머니 기다리다 제가 싼 노란 똥 먹는 어린 세 살 마당은 늘 비어 있고 여름이란 여름은 온통 초록을 향해 눈멀어 있던 날들 광목천에 묶여 있는 연한 세 살 뻐꾸기 울음에 쪼여 귓바퀴가 발갛게 문드러지던 대낮들 그곳 때까치 집, 지빠귀 집 뻐꾸기가 떨어뜨려 놓고 간 아들 하나 알에서 나와 운다 뻐꾸기 운다 ―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이가서, 2006)

그 가시내 /이대흠

그 가시내 이대흠 그 가시내 무척 예뻤네 솟기 시작한 젖가슴에 내 가슴 동동거렸지 십 년 넘도록 말 한마디 못했네 만나면 내 먼저 고개 돌리고 몰래 쓴 편지는 달을 향해 쌓여졌네 내 비록 고무줄 툭툭 끊어 놓았지만 그 가시내 눈만 보면 토끼처럼 달아났네 비 오는 날에도 햇살 왜 그렇게 왜 그렇게 따가웠을까 중학 시절 풀빵 보면 그 가시내 오동통한 보올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내 마음은 언제나 물 오른 버들가지 발자욱 소리에도 몰래 혼자 떨었다네 너무 오래 좋아하면 그 사람 멀어지네 그 가시내 무척 이뻤네 졸업하고 헤어졌네 그뿐이었네 ―시집 『상처가 나를 살린다』(현대문학북스. 2001 )

사월에 걸려온 전화 /정일근 -그 가시내 /이대흠

사월에 걸려온 전화 정일근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 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의 화끈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생에 사월 꽃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 저도 ..

사월에 걸려온 전화 /정일근

사월에 걸려온 전화 정일근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 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의 화끈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생에 사월 꽃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 저도 ..

폭탄 돌리기 /신미균

폭탄 돌리기 신미균 심지에 불이 붙은 엄마를 큰오빠에게 넘겼습니다 심지는 사방으로 불꽃을 튀기며 맹렬하게 타고 있습니다 큰오빠는 바로 작은오빠에게 넘깁니다 작은오빠는 바로 언니에게 넘깁니다 심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에게 넘깁니다 내가 다시 큰오빠에게 넘기려고 하자 손사래를 치며 받지 않겠다는 시늉을 합니다 작은오빠를 쳐다보자 곤란하다는 눈빛을 보냅니다 언니는 쳐다보지도 않고 딴청을 부립니다 그사이 심지를 다 태운 불이 내 손으로 옮겨붙었습니다 엉겁결에 폭탄을 공중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엄마의 파편이 우리 머리 위로 분수처럼 쏟아집니다

오산 인터체인지 /조병화

오산 인터체인지 조병화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燈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조히 떨어져 있고 허허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리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8』(조선일보 연재, 2008) ============================================================================================ 시의 행과 연구분에 대해서 인터넷 신문에서 시를 보다 보면은 인터넷 판에 실린 시와 종이 신문에 실린 시의 행과 연 구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조병화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조병화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의 가슴에 안겨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이 아스팔트. 어느 이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을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을 했습니다.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

비교 읽기 -귀 /콕토 -소라 /조병화

귀 콕토 내 귀는 소라 껍질 바다 소리 그리워라. -김희보 편저『世界의 名詩』(종로서적, 1987) ------------------------ 소라 조병화 바다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며시 물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에 굳어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의자 /조병화

의자 조병화 지금 어디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 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디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 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제 13시집《시간의 숙소를 더듬어서》(1964) 수록 -시선집 『한국의 명시』김희보 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