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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왕국 ―동물계 소파과 의자속 남자 사람 /권혁웅

동물의 왕국 ―동물계 소파과 의자속 남자 사람 권혁웅 소가 트림의 왕이자 이산화탄소 발생기라면 이 동물은 방귀의 왕이자 암모니아 발생기입니다 넓은 거실에 서식하면서 소파로 위장하고 있죠 중추신경은 리모컨을 거쳐 TV에 가늘게 이어져 있습니다 배꼽에 땅콩을 모아 두고 하나씩 까먹는 습성이 있는데 이렇게 위장하고 있다가 늦은 밤이 되면 진짜 먹잇감을 찾아 나섭니다 치맥이라고, 조류의 일종입니다 이 동물의 눈은 카멜레온처럼 서로 다른 곳을 볼 수 있죠 지금 프로야구와 프리미어리그를 번갈아 보며 유생 때 활발했던 손동작, 발동작을 회상하는 중입니다 본래 네발 동물이었으나 지금은 퇴화했거든요 이 때문에 새끼를 돌보는 건 흔히 어미의 몫이죠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은 큰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급격한 호르몬 변화 때문인..

아버지의 신념 /박용숙

아버지의 신념 박용숙 이빨 빠진 도장 한 번에 논배미는 영문도 모른 채 다른 주인 섬겼다 오라비 학자금 마련에 새벽 댓바람 고무신 종종걸음 대문 높은 집에 염치없는 손 내밀지 않았을 터 그 땅만 있었어도, 그 땅만 있었어도 귀 에는 바람 어머니 속 울어댔다 애써 외면했지만 아버지의 시선, 닷 마지기 논에 머물고 경칩 무렵 잠에서 깬 눈치 없는 개구리 아버지 속 시끄럽게 긁어댔다 읍내 농협에서 날아온 빚보증 독촉장에 아버지와 대작하던 고추장 바른 멸치가 더 붉게 울상짓던 날 사람이 먼저지 그까짓 땅이 대수냐 하시던 아버지 가슴도, 비워진 술잔도 지난해 가뭄처럼 쩍쩍 갈라진 논바닥 되어 갔다 논배미 고무신 발자국마저 한낮의 장대비에 슬그머니 자취 감추어 버렸다. ㅡ웹진 《시인광장》(2024, 3월호)

세상에 숨길 수 없는 것 / 공광규, 디카시

세상에 숨길 수 없는 것 ​ ​ ​ 화단에 몰래 묻어두었던 심장 두 개 올 여름 튤립으로 솟아났다오 세상에 숨길 수 없는 한 가지 우리 사랑 ​ ​ ​ ​ ​ ​ 세 편의 디카시 창작과정 사례 ​ 공광규 ​ ​ 1. 「몸뻬바지 무늬」와 「수련잎 초등학생」 나의 졸작, 제1회 디카시 작품상을 받은 「몸뻬바지 무늬」는 남산 예장동에서 회의를 하고 충무로로 점심을 먹으러 내려오다가 국화분에 가득 담긴 소국을 발견하고, 꽃의 크기가 비슷하게 어떤 질서를 이루고 있는 듯해서, 스마트폰으로 위에서 정면으로 내려찍은 뒤 문자를 붙인 것이다. 사진과 문자 내용은 인터넷 연관검색을 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편의 졸작, 2019년 6월 고2 전국연합학력평가에 문제지 지문으로 출제되어 디카시를 고등학교에 확..

봄은 /이대흠

봄은 이대흠 조용한 오후다 무슨 큰 일이 닥칠 것 같다 나무의 가지들 세상곳곳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숨쉬지 말라. 그대 언 영혼을 향해 언제 방아쇠가 당겨질 지 알 수 없다. 마침내 곳곳에서 탕,탕,탕,탕 세상을 향해 쏘아대는 저 꽃들 피할 새도 없이 하늘과 땅에 저 꽃들 전쟁은 시작되었다 전쟁이다. -시집『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창비, 1997)

비교 감상 [정호승] 서울의 예수 - [고정희] 구정동아 구정동아

비교 감상 [정호승] 서울의 예수 - [고정희] 구정동아 구정동아 서울의 예수 정호승 1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는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람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

기대 /장이지

기대 장이지 당신의 편지가 오네 오고 있네 내가 그것을 소리 내어 읽으면 당신의 혀가 내 귓불에 닿고 당신의 부드러운 혀가 내 귀 안에 이미 있네 당신의 편지는 오고 있네 오네 동구 밖까지 왔을까 잡화점 앞을 무사히 지났을까 라플란드의 집배원이 커다란 가방에서 당신 편지를 찾아 초록색 지붕의 집 귀에 넣어둘 것이네 오, 나는 그것을 소리 내어 읽어야지 소리 높여 읽어야지 그러면 이미, 내 귀 안에 있는 당신의 혀, 당신 혀의 무수한 미뢰들, 하나하나 벙그는 말의 꽃봉오리들 ―시집 『편지의 시대』 (창비, 2023)

소월 시 모음 -필사

소월 시 따라 쓰기 ㄱ 제목의 시 1 가는 길/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番)…… 저 산(山)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西山)에는 해 진다고 지저깁니다 앞강(江)물, 뒷 강(江)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98.02.02/ 오후 3시 55분 ▷ 연달아 : 연(連)달아. 연이어. 계속해서 이어지는. ▷ 흐릅디다려 : '흐릅디다'와 '그려'의 융합형 2 가을 아침에 어둑한 퍼스렷한 하늘 아래서 회색(灰色)의 지붕들은 번쩍거리며, 성깃한 섶나무의 드문 수풀을 바람은 오다가다 울며 만날 때, 보일락말락하는 멧골에서는 안개가 어스러히 흘러쌓여라. 아아 이는 찬비 온 새벽이러라. 냇물도 잎새 아래 얼어붙누나. 눈물에 쌓여..

속삭임 1 /오탁번

속삭임 1 오탁번 2022년 세밑부터 속이 더부룩하고 옆구리가 아프고 명치가 조여온다 소리를 보듯 한 달 내내 한잔도 못 마시고 그냥 물끄러미 술병을 바라본다 무슨 탈이 나기는 되게 났나 보다 부랴사랴 제천 성지병원 내과에서 위 내시경과 가슴 CT를 찍고 진료를 받았는데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다 (참신한 비유는 엿 사 먹었다) 췌장, 담낭, 신장, 폐, 십이지장에 혹 같은 게 보인단다 아아, 나는 삽시간에 이 세상 암적 존재가 되는가 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1초쯤 지났을까 나는 마음이 외려 평온해진다 갈 길이 얼마 남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가는 것보다야 개울 건너 고개 하나 넘으면 바로 조기, 조기가 딱 끝이라니! 됐다! 됐어! —2023. 01.05 ㅡ유고 시집 『속삭임』(서정시학,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