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과 사진/시 읽기 122

진달래꽃 /이우디

진달래꽃 이우디 열 손가락 모자라 헤아리지 못합니다 피었다 진 날들, 꽃빛 잊었는지 아니 행복한지 궁금한 그 사람을, 아직도 잊는 중입니다 ㅡ시집『수식은 잊어요』(황금알, 2020) -------------- 저는 한때 우리나라 꽃이 무궁화가 아니라 척박한 산성땅에서도 잘 자란다는 전국산천의 어디에나 피고 있는 진달래꽃이 우리나라 꽃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진달래꽃 하면 누가 생각날까요? 뭐 물어보나마나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 시작하여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로 끝나는, 만인이 다 아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지요. 또 그다음에 진달래꽃 하면 생각나는 시는 누구일까요? 많은 시인들이 진달래꽃을 노래했고 참 많이도 쓰여 졌습니다. 직설적이든 은유든 비유든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진..

어느 슬픔이 제비꽃을 낳았나 /곽도경

어느 슬픔이 제비꽃을 낳았나 곽도경 누가 눈물 떨구어 흙 속에 묻었나 누가 그 슬픔 빠져나오지 못하게 시멘트를 덮었나 단단한 바닥 틈서리 밀어내며 올라온 눈물 그렁그렁한 그 아이 ㅡ시화집『오월의 바람』(두엄, 2020) 세상에 진달래꽃 밖에 없는 줄 알다가 등산을 시작하고부터 제일 먼저 관심을 가진 꽃이 제비꽃이었습니다. 제비꽃도 보라색만 있는 줄 알았는데 북한산을 등산하다가 노랑꽃이 모다기모다기 노랑나비처럼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반해서 사진을 찍기 사작했습니다. 노랑제비꽃이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그저 노랑제비꽃도 있구나 싶었는데 흰꽃이 핀 제비꽃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제비꽃이 무려 60여종이 넘고 지금도 계속해서 잡종이 생겨나고 있을 거라고 합니다. 보라색 외 처음 본 노랑제비꽃을 비롯하여..

고양이의 방 /이은경

고양이의 방 이은경 그 방에는 밖이 궁금한 고양이가 산다 털이 부드러워 공기로 떠다니는 위험한 고양이 목소리는 너무 작아 목울대에 멈춰있는 치즈 빛깔 소유할 수 없는 그리움의 고양이 한 마리 모래를 만나면 영역을 표시하는 사막에서 쫓겨난, 사막을 그리워하는 종족 별빛 내리는 창가를 보며 높은 곳만 오르는 습성 창을 열면 까마득한 허공 문밖이 그립다고 뛰어내릴 수도 없는데 오직 혼자만의 세상이 당연한 고양이의 고립 어제도 오늘인, 오늘도 내일인 고양이의 숨소리 방황이 두려운 길고양이는 길들여진 유전자를 숨기고 날카로운 발톱을 거세하고 들판의 자유도 감금한 깊은 우물처럼 조용한 그 방에서 사각사각 들리는 저 소리는 자라나는 야성인가 오늘 밤 탈출보다 푸른 언덕을 그리워하며 어둠을 엿보는 한 마리 고양이 고양..

일인칭의 봄 /이명숙

일인칭의 봄 이명숙 꽃이 피겠다는데 막을 수 있겠어요 아까시꽃 찔레꽃 아직 피우지 못한 언어는, 어느 먼 생의 입술에서 필까요 꽃들 망막에 꽂힌 흰빛 푸른빛 사이 서로 다른 오늘의 왼눈 오른눈 사이 간 봄의 볕에 타버린 혀의 뿌리 찾아서 꽃이 지겠다는데 막을 수 있겠어요 검은 숲에 버려져 스마트만 진심인 우리는, 어느 천년 후 여기 다시 올까요 불두화 합장하는 그렇고 그런 봄날 귀 적시는 소리에 그저 우연이란 듯 서운암 꽃자리마다 술렁이는 눈빛들 ㅡ부산시조 통권 50호 기념시조집 『서운암, 시조에 물들다』(부산시조시인협회, 2021) ㅡ시조집『튤립의 갈피마다 고백이』(문학들, 2022) ----------------------- 시의 제목이 일인칭의 봄이다, 이인칭도 있고 삼인칭도 있는데 왜 하필 일인칭..

삼류 /이이화

삼류 이이화 칼바람 한 귀퉁이 꺾어 오랜 동반자 삼아 어깨에 메고 지난밤 잠시 말아 두었던 길을 새벽어둠 속에 펼쳐 놓는다 찢겨진 잠에서 뛰어나온 코딱지만 한 점포가 달려와 하루치 셋값을 선금으로 계산하느라 분주해지면 동대문 어느 여공의 거친 손을 쓰다듬다가 박음질로 달려온 시장표라는 이름의 옷이 보푸라기꽃 피워 낼 주인공을 기다린다 비쌀수록 없어서 못 판다는 백화점 명품관에서 클래식 음악이 고상하게 일류 고객을 위해 목청을 높이는 동안 시장 바닥의 질척한 삶은 더 깊은 언더그라운드 속에 갇히곤 한다 학습된 유산도 변변한 취향도 정착하지 못해 빈 가지처럼 마구 흔들리는 날 소주 한 병과 안주로 곁들인 뽕짝 가가 한 구절에 입맛이 돌아 마시고 또 마시던 하급의 노래들 찾아오는 단골손님의 얇은 지갑마다 걱정..

칸나가 피는 오후 /이이화

칸나가 피는 오후 이이화 하늘거리는 연분홍 블라우스 여미면서 봄날이 떠나간 도로 한 귀퉁이 수다쟁이 여름 붙들어 세워 두고 여자가 도착했다 늘씬한 큰 키에 걸친 푸른 원피스 자락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차창 밖으로 휘파람 날리는 사내들 눈빛이 위태롭다 한 올 한 올 짜내려 간 노른자 같은 시간들이 너무 느슨하거나 너무 팽팽하게 당겨지는지 새빨간 립스틱만 자꾸 덧칠하고 서 있는 여자 계절은 지나온 시절을 복사하다가 붉은색 잉크를 엎질러 체감온도 급상승을 찍고 있는데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한낮 타는 목 길게 빼고 싼 티 나는 웃음 치대며 여름을 팔고 있는 그 여자 칸나 ―시집『칸나가 피는 오후』(그루, 2021) ------------------- 여름만 되면 칸나가 눈에 밟힌다. 저한테 아무 빚진 것도 ..

메이팅 콜 /박숙경

메이팅 콜 박숙경 창문을 닫지 마 반짝이던 한낮의 수식어들 모두 잠들어버린 달빛의 시간이야 통속적이라고 놀려도 괜찮아 창틀에 앉아 목을 빼고 건너편 흰 고양이를 훔쳐보기도 해 너의 심장을 만져보고 싶어 너의 젖은 발바닥을 만져보고 싶어 애써 울려고 노력하지 마 애써 웃으려고도 하지 마 잃어버린 너의 목소리는 잃어버린 너의 과거야 그러니 오늘밤은 나랑 놀아줄래 망설이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고 ㅡ시집『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시인동네, 2021) ---------------- 소리로서 애원하는 사랑을 ‘메인팅 콜‘이라고 한다. 고양이들의 사랑놀이도 이 메이팅 콜로 시작을 하는데 신혼 때의 일이다. 창문 밖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새벽 2시 누가 아기를 버리고 갔나 도무지 잠을 이룰..

월곶 포구 /조병기

월곶 포구 조병기 갈매기 몇 마리 드문드문 고깃배 몇 척 갯벌에 앉아 졸고 있다 바닷물은 언제 들어올지 몇 해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었는데 수산시장 단골집 문도 잠겨 있다 골목길 두어 바퀴 돌다가 가까스로 찾은 순대국집에서 혼자 낮술을 마신다 세상살이가 좋아졌다는데 살기가 엄청 편리해졌다는데 갈수록 낯설기만 아직도 섬 뒤에 숨어버린 바다는 돌아올 줄을 모른다 고깃배 던져버리고 가버린 그 친구 지금 어디 가 사는지 ―월간『우리詩』(2021, 8월호 398호) ------------- 월곶포구가 어디일까,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우리나라 포구도 많겠지. 어딘가 찾아보니 경기도 시흥 쪽이다. 가까이 소래포구도 있고... 소래포구는 워낙 알려져 말할 것도 없지만 수도권에서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운 월곶포구 는 ..

대추나무 꽃 /나병춘

대추나무 꽃 나병춘 대추나무는 게으르기 짝이 없다 봄에는 가장 늦게 새 연두 잎사귈 피운다 쬐끄만 꽃들은 보일락 말락 향기도 풍길락 말락 하지만 추석 무렵에 보면 태풍 장마도 이긴 싱싱한 열매들 태양의 힘을 뽐내듯 제법 토실 토실하다 작은 꼬추가 맵다더니 호동그란 대추 알맹이 속에 해와 달, 무수한 별들이 반짝반짝 숨쉬고 있다 ―시화집『꽃』(한국시인협회, 2020) ---------- 꽃마니아도 아니면서 산에 가면 꽃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꽃이 이쁘기도 하거니와 그보다 꽃 이름이 궁금하였던 것이다. 산골에서 태어나서 수많을 들꽃을 보고 자랐지만 꽃이 크고 화려한 꽃에만 눈길을 주었지 작은 풀꽃들은 발에 밟히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쩌다가 도시에 살게 되면서 등산을 하게 되면서 시를 ..

선운사 동백 /이이화

선운사 동백 이이화 햇살 노랗게 만개하는 춘삼월에는 선운사 육덕 좋은 절집 여인네 부처님의 엄중한 눈길 피해 새빨간 립스틱으로 치장하고 사랑을 안다고 큰소리치는 전국의 사내들을 불러 모은다지 봄바람으로 살랑대는 마음 들킬까 복분자주 술잔 속에 불콰하게 감추고 장어구이 안주빨이 힘 좋게 불뚝거리면 새빨갛게 농익은 입술 훔치고 싶은 사내들 안달복달이 난다지 줄 듯 말 듯 아찔하게 애간장 녹이다 매몰차게 거절하는지 저 요염 앞에 헛물만 켜던 못난 자존심이 머리 위에 내려앉는 노을 향해 삿대질해 대다가 내년을 기약하고 돌아선다지 ―시집『칸나가 피는 오후』(그루, 2021) ------------------------------다시 가보고 싶은 선운사------------------------- 선운사는 사찰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