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과 사진/시 읽기 122

은둔지 /조정권

은둔지 조정권 시는 무신론자가 만든 종교. 신 없는 성당, 외로움의 성전, 언어는 시름시름 자란 외로움과 사귀다가 무성히 큰 허무를 만든다. 외로움은 시인들의 은둔지, 외로움은 신성한 성당, 시인은 자기가 심은 나무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 나는 나무에 목매달고 죽는 언어 밑에서 무릎 꿇고 기도한다. 시인은 1인 교주이자 그 자신이 1인 신도, 시는 신이 없는 종교, 그 속에서 독생獨生하는 언어. 시은市隱*하는 언어 나는 일생 동안 허비할 말의 허기를 새기리라. *세속 속에서의 운둔. ㅡ『유심』(2013. 4) ㅡ시집『고요로의 초대』(민음사, 2011) ------------------------- 시인에게 있어 ‘시’는 연인이자 애인, 오르고 싶은 나무 그리움의 대상이다. 마냥 말을 걸고 싶..

우스개 삼아 /이시카와 타꾸보꾸

우스개 삼아 이시카와 타꾸보꾸 우스개 삼아 엄마를 업었으나 그 너무 가벼움에 눈물겨워져 세 발짝도 못 걸었네 ―김희보 편저『韓國의 명시』(종로서적, 1986) 어머니를 업어본 적이 있나요. 무심히 흐르는 세월 속에 알맹이마저 자식들에게 다 빼 준 어머니는 몸도 마음도 자꾸만 가벼워져 갑니다. 오래 전에 어머니를 안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참매미 자지러지고 뒷산 뻐꾸기 한가롭게 울어대는 어느 해 여름이었습니다. 밭일하다 오신 어머니 이랑에 뽑힌 지심처럼 고달픈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문득 어머니 옆에 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소에도 심장이 약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놀라 잘 깨는 어머니인지라 벽 쪽을 향해 누우신 어머니 등 뒤로 살그머니 누웠습니다. 좁은 어깨가 측은하게 보이는데 괜히 장난기가..

우체국 계단 /김충규

우체국 계단 김충규 우체국 앞의 계단에 나는 수신인 부재로 반송되어 온 엽서처럼 구겨진 채 앉아 있었다 빨간 우체통이 그 곁에 서 있었고 또 그 곁에는 늙은 자전거가 한 대 웅크려 있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단물이 다 빠져나간 바람이 싱겁게 귓볼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편지 혹은 엽서를 안 쓰고 지낸 지 몇 해가 지났다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애써 기억의 밭에 파종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길 건너편의 가구점 앞에서 낡은 가구를 부수고 있는 가구점 직원들, 그리움도 세월이 흐르면 저 가구처럼 낡아져 일순간 부숴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낡은 가구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정 그리워서 미쳐버릴 지경에 이르면 내 이마에 우표를 붙이고 배달을 보내리라 우체국의 셔터가 내려..

누나가 주고 간 시 /이 철

누나가 주고 간 시 이 철 112-2119-1212-09 부산은행 이진희 철아 누야다 3만원만 부치도라 미안타 택배 일 하다 늦게 본 문자 시집 내려면 출판사에 300만 원 함진아비 함지고 가듯 발문에 50만 원 못난 시 시집 보내려고 집사람 몰래 3년간 모아온 돈 250만원 해병대 출신 자형 만나 아들 둘 낳고 반여2동 새벽별 아래 찬송가를 부르며 하루에 한 바퀴 여리고성을 도는 누나 그 누야한테 멀쩡한 돈 5만 원을 보냈다 시가 좀 모여도 돈 없으면 시한테 미안하고 점심값 아껴가며 돈을 좀 모아놓고도 시가 안 써지는 장마철 누나가 시 한 편 주고 갔다 단돈 5만 원에 ―시집『단풍 콩잎 가족』(푸른사상, 2020) --------------------- 시를 쓰는 사람에게 시집은 좋은 선물이다. 그래서..

시를 쓰고 있는데 /권이영

시를 쓰고 있는데 권이영 내가 시를 쓰고 있는데 아내는 베란다 화초에 물이나 주라고 하네 내가 시를 쓰고 있는데 아내는 은행이나 다녀오라고 하네 내가 시를 쓰고 있는데 아내는 슈퍼마켓에나 다녀오라고 하네 내가 시를 쓰고 있는데 아내는 설거지나 도와 달라고 하네 내가 시를 쓰고 있는데 아내는 화장실 청소나 하라고 하네 아니, 도대체 내가 지금 시를 쓰고 있다는데! ―월간『현대문학』(2020년 10월호) 이 시를 읽고 있으니 꼭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알아줄 만한 시를 쓰는 것도 아니라서 그냥 내 좋아서 딱히 다른 일을 할 것도 여력도 없어서 취미라는 말을 붙여 시라는 것을 읽고 보고 있지만 어떤 때는 아니 시보다 나는 산을 오르고 산의 풍경이나 감상하며 꽃 사진이나 찍으면서 유유자적 걷는 것이 더 좋을..

김씨 /임희구

김씨 임희구 쌀을 씻어 안치는데 어머니가 안 보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어머니가 계실 것이다 나는, 김씨! 하고 부른다 사람들이 들으면 저런 싸가지 할 것이다 화장실에서 어머니가 어! 하신다 나는 빤히 알면서 뭐해? 하고 묻는다 어머니가 어, 그냥 앉아 있어 왜? 하신다 나는 그냥 불러봤어 하고는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인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똥을 누려고 지금 변기 위에 앉아 계시는 어머니는 나이가 여든다섯이다 나는 어머니보다 마흔 한 살이 어리다 어려도 어머니와 아들 사인데 사십 년 정도는 친구 아닌가 밥이 끓는다 엄마, 오늘 남대문시장 갈까? 왜? 그냥 엄마가 임마 같다 ―시집『소주 한 병이 공짜』(문학의전당, 2011) --------------------------------------------..

봄 /이성부

봄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미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누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50]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5』(국립공원, 2007) 산수유, 새앙나무, 벚나무, 살..

로또 /김봉용

로또 김봉용 그녀는 로또다 맞는 게 하나도 없다 대박을 꿈 꾸며 살아왔지만 취미도 다르고 습관도 다르고 입맛도 다르다 이제는 따로 논다 내가 앞을 보면 뒤를 보는 늘 어긋나는 관계이지만 생을 걸어가는 방향은 같다 ―시집『저녁 무렵의 램소디』(시산맥사, 2020) ----------------------------------------- 시 속에 숨어 있는 미학적 단순 명료한 진실 시의 내용을 읽기도 전에 제목만 봐도 관심이 가는 로또입니다. 누구나 대박을 꿈꾸는 로또 하지만 아무나 되지 않는 로또...언뜻 생각하기엔 로또를 사서 천원이라도 되었나 아니면 만날 사도 꽝이라는 어떤 안타까운 사연이 들어있나 싶은데 엉뚱하게도 부부 이야기입니다. 캬캬캬, 이렇게 웃으면 안 되는데 몇 줄을 읽는 순간 웃음이 터집..

따뜻한 봄날 /김형영

따뜻한 봄날 김형영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 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 감아버리더니 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하시나요.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하시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시집『다른 하늘이 열릴 때』 (문학과지성사, 198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고려장에 대해서는 구구한 얘기들이 많다. 우리..

남으로 창을 내겠소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시집『망향』(문장사, 1939) --------------- 종편채널을 돌리다보면 귀촌, 귀농하는 프로그램도 방영하지만 이른바 자연인이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오지에서 홀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프로그램을 볼 수 있다. 개그맨이 출연하여 이삼일 같이 생활하며 자연인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백석 시인은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라고 하는데 이 자연인이라는 사람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