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길목에서 15
입원 10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아내가 없는 병실에서 한 시간은 더 기다린 것 같았다. 여덟 시에 수술실에 들어가 아홉 시 십 분에 아기가 태어났고 씻겨서 수술대기실로 데리고 나온 시간이 9시 25분, 그리고 간호사가 아무 말도 없이 급히 아기를 데리고 간 뒤 병실로 온 지금 또 한 시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고요 속에 정지한 것만 같은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아내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부분마취가 듣지 않으면 전신 마취를 해야 한다고 하더니, 만약 전신 마취를 했다면 아직 깨어나지 않아서 지금도 회복실에 있는지 아니면 수술 중 뭐가 잘못되어 다른 치료를 받고 있는지 어떻게 된 일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시계를 안 보고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초조한 마음에 나는 시계를 보고 또 보고 계속해서 보고 있었다. 어제 새벽 두 시 넘어서까지 아내가 누워있던 빈 침대를 지키고 있는 사이에도 여전히 빈 시간만이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마냥 흐르는 시간 속에 생각은 망각의 숲을 헤매며 어디론가 자꾸 떠가는 것만 같았다. 멍한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니 좁은 시야 속에 갇혀버린 풍경이 더욱 좁아지면서 가까이 내게로 다가온다. 아내가 입원하고 있는 산부인과 3층 입원실에서 창 아래를 내려다보면은 주차장의 차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눈을 들어 주위를 자세히 천천히 둘러보아도 추운 날씨 때문인지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고 잎 다 떨어진 나무들이 추위에 가지들이 떨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날 옆에서 차를 보다가 위에서 내려다보았더니 차의 지붕들이 사각으로 보인다. 색다른 느낌으로 보여서 차들마다 지붕에 눈길을 주었더니 그중에서도 길이가 작고 색깔이 빨간 프라이드가 유난히 눈에 쏘옥 클로즈업되어 들어온다. 그리고 무슨 생각이 났는지 나는 캠코더를 들고서 병실을 나섰다. 병원 뜰에 주차 한 차를 찍기 위해서였다. 손돌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견디고 있는 빨간색 차를 향해서 녹화 버튼을 눌렀다. 병원 주차장에 와서 있는 것이 무슨 기념이라고 하릴없이 비디오나 찍고 있담. 아내는 오지 않고 있는데.
새 차를 사기전에 운전 연습이나 하려고 산 차였는데 어디로 비가 새는지 비가 좀 많이 오면 뒷좌석바닥에 빗물이 흥건히 고여서 퍼내야 하는 차. 고속도로에서 90킬로가 넘어가면 핸들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덜 떨려서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게 하는 차, 후진할 때는 핸들이 얼마나 뻑뻑한지 온몸을 비틀어서 핸들을 돌려야 하는 차. 어쩌다 시골에 한 번씩 갈 때마다 혹시 가다가 퍼지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하고 내리막 산길에서는 브레이크가 파열되어서 그냥 굴러갈까 봐 불안에 떨게 하는 차이지만 아내가 병원에 입원한 뒤로는 아주 긴요하게 쓰여지고 있는 차였다.
언젠가 애들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가 올 적에 큰애가 하던 말이 생각이 났다. “아빠, 우리 이 차 참 잘 샀다 그지?” 맞다 이 똥차라도 없었으면 얼마나 불편할까 생각하니 비디오 촬영을 안 해둘 수 없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저 차에다가 아내와 새로 태어난 아기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아내가 수술실로 들어간 아내가 몇 시간이 지나도록 입원실로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였다. 눈은 창밖을 내다보고 있지만 마음은 병실 입구로 향해 있었다. 이제라도 아내가 들어올까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소리가 들리더니 침대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따로 침대차에 누워서 이 병실에 들어 올 사람도 없었지만 옆 모습만 보아도 아내인 줄 알 수 있었다. 반가움에 몇 발길도 안 되는 거리를 뛰어서 갔다. 병원 뒷일을 보는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눕히고 나니까 아내의 큰 얼굴이 유난히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 퉁퉁 부은 얼굴, 온몸에 힘이 다 빠져 침대에 누워있는 아내를 바라보니 눈물이 피잉 돌았다. 어젯밤까지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얼마나 마음이 조마조마했던가. 이제 아기도 무사히 태어났고 아내도 별일 없이 돌아와 내 곁에 있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운데 앞에 누워있는 아내를 바라보고 있으니 가슴이 저리고 아파 온다. 왜 그렇게 불쌍하게 보이는지. 왜 그렇게 가여워 보이는지. 고통과 힘겨움에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으나 지치고 힘겨운 아내는 닦을 생각도 못 하고 있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고 그냥 바라만 보고 있으니 미안하고 불쌍해서 바라보는 것조차 죄스러웠다. 불안과 공포가 지나가고 그래도 병실로 돌아온 것이 안심이 되는지 아니면 지칠 대로 지쳐 아무 생각도 안 나는지 아내는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수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정말 고생이 많았다고,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당신 눈에 눈물 나는 일은 하지 않겠노라고. 뒤끝은 없지만 순간적으로 잘 내는 화도 내지 않고 당신이 싫어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빚진 것이 있다면 살아가면서 다 갚아 줄 거라고. 그리고, 그리고 뭐든지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할 거라고. 아무튼 생각나는 대로 다짐이란 다짐은 다 한 것 같은데......
그렇게 다짐하고 살아온 지 십 년이 흘렀다. 그 다짐이 일 년이 갔는가. 몇 년이 갔는가. 지금 생각해 보니 아내여! 그때 다짐한 수많은 말들과 맹세는 헛맹세가 되고 작심삼일이 된 것만 같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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