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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숨길 수 없는 것 / 공광규, 디카시

흰구름과 함께 2024. 3. 19. 09:31

 

세상에 숨길 수 없는 것

화단에 몰래 묻어두었던

심장 두 개

올 여름 튤립으로 솟아났다오

세상에 숨길 수 없는 한 가지

우리 사랑

세 편의 디카시 창작과정 사례

공광규

1. 「몸뻬바지 무늬」와 「수련잎 초등학생」

나의 졸작, 제1회 디카시 작품상을 받은 「몸뻬바지 무늬」는 남산 예장동에서 회의를 하고 충무로로 점심을 먹으러 내려오다가 국화분에 가득 담긴 소국을 발견하고, 꽃의 크기가 비슷하게 어떤 질서를 이루고 있는 듯해서, 스마트폰으로 위에서 정면으로 내려찍은 뒤 문자를 붙인 것이다. 사진과 문자 내용은 인터넷 연관검색을 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편의 졸작, 2019년 6월 고2 전국연합학력평가에 문제지 지문으로 출제되어 디카시를 고등학교에 확산시키는 역할을 한 「수련잎 초등학생」은 대구 경북대 교정 연못을 벤치에서 내려다보다가 수련잎이 어떤 질서를 이루고 수면에 펼쳐있는 것 같아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문자를 붙였다. 사진과 문자 역시 인터넷 연관검색을 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세상에 숨길 수 없는 것」은 을지로1가 교차로 화단에서 찍은 사진에 문자를 붙인 것이다. 서울 중구 다동에서 명동으로 건너가는 을지로1가 교차로 건널목을 자주 왔다 갔다 한 것이 27년이 넘어 거의 28년이 되어간다. 교차로 화단에는 철마다 꽃이 피고 진다. 수선화도 피고 장미도 피고 금잔화도 피고 일일초도 피고 루드베키아도 핀다. 시간차를 두고 이른 봄에서 늦가을까지 꽃이 피도록 구청에서 관리한다.

2. 사진 찍기

올 여름 어느 날 명동으로 건너가다가 붉은 튤립 두 송이를 만났다. 나란히 서서 피어있었다. 색깔이 심장처럼 붉었다. 그것도 서로 가까이서 비슷한 크기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남녀를 발가벗겨 몸을 투시하는 붉은 색만 보는 기계로 보면 튤립을 닮은 심장 두 개만 보일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문자를 덧붙였다.

이렇게 디카시의 시작은 사물이나 사건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땅에서 솟아오른 튤립을 만났을 때 맨 먼저 눈이 간 것은 붉은 색감이었다. 붉은 색감이 나를 강렬하게 유혹했다. 이렇게 저렇게 방향과 높이를 바꾸어가며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몇 년 전 국립중앙도서관과 고성에서 디카시를 강의할 때 사진을 어떻게 찍을까를 순서대로 정리한 적이 있다.

첫째, 일상에서 쉽게 만나는 것

둘째, 연출하지 말 것

셋째, 이야기가 있는 것

넷째, 피사체에 가까이 갈 것

이렇게 사진을 찍고, 사진을 보면서 이야기를 떠올리면 된다. 이미 사진을 찍기 전에, 사진이 이야기가 될 것인지 아닌지는 대개 직감으로 알게 된다. 물론 사진을 찍어두고 한 참 후에야 이야기가 생겨날 수도 있다. 찍어둔 사진도 뚫어지게 관찰할 일이다.

3. 문자 쓰기

사진을 보면서 문자로 옮기는 작업을 하면 된다. 문자는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흥관군원興觀群怨(감흥하고, 관찰하고, 사교하고, 풍자한다)의 원리를 활용하면 쉬울 것이다. 사물을 만났을 때 감흥을 해야 시가 시작된다. 감흥이 없으면 이미 사진을 찍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음에는 대상을 관찰하여 묘사하는 것이다.

관찰이 없다면 묘사도 없고 발견도 없을 것이다. 발견이 없는 글은 싱겁다. 질서가 있는 소국 꽃송이에서는 어머니의 몸뻬바지 무늬를 발견했고, 수련잎에서는 수업이 끝나서 재잘거리며 교문을 빠져나오는 초등학생들을 발견한 것이다. 붉은 튤립 두 송이에서는 심장 두 덩이를 발견한 것이다.

첫째, 쉽게 쓴다. 읽어가면서 뜻이 오도록

둘째, 간결하게 쓴다. 사진을 방해하지 않게 5행 내외로

셋째, 이해 가능한 비유적 문장으로 쓴다. 비유는 시가 되기 위한 요건이다.

넷째, 퇴고한다. 쉽고 매끄럽게

디카시 「세상에 숨길 수 없는 것」은 계간 《시와편견》 가을 호에 발표했다. 사랑은 끝까지 비밀이어야 한다. 사랑은 공유하는 게 아니다. 독점이다. 공개가 아니다. 사적이어야 하고 몰래해야 한다. 사랑은 배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감출 수 없다. 표정으로 튀어나온다. 밝고 환한 얼굴로 생동한다. 흙속에서 튀어 오른 붉은 튤립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