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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만드는 9개의 비망록 / 정일근

시인을 만드는 9개의 비망록 / 정일근 1. 슬픔이 시인을 만든다 나를 시인으로 만든 것은 ‘슬픔’이었다. 그 슬픔에 힘입어 처음 “시인이 돼야겠다”는 꿈을 가진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 전 해 4월, 벚꽃의 도시 진해에서 나는 ‘아비 없는 자식’이 되었다. 아버지가 없는 빈자리에 제일 먼저 슬픔이 찾아왔다. 아버지의 생몰 연대는 길 위에서 끝이 났다. 그 날 아버지는 당신의 오토바이에 어머니를 태워 마산에 있는 친척 댁에 다녀오시는 길이었는데, 길 위에서 택시가 아버지의 생을 덮치고 뺑소니쳐 버렸다. 의식불명이 되어 안방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고통스럽게 숨을 쉬고 계셨지만, 군의관이었던 아버지 친구는 단호하게 사망진단을 내렸다. 사인은 뇌진탕. 마산에서 진해로 출발하며 아버지는 자신의 헬멧을 ..

비교 시 읽기 -나의 집 /김소월 - 꽃신 /서정춘

나의 집 김소월 들가에 떨어져 나가앉은 메 기슭의 넓은 바다의 물가 뒤에 나는 지으리, 나의 집을 다시금 큰길을 앞에다 두고 길로 지나가는 그 사람들은 제가끔 떨어져서 혼자 가는 길 하이얀 여울턱에 날은 저물 때 나는 문간에 서서 기다리리 새벽 새가 울며 지새는 그늘로 세상은 희게 또는 고요하게 반짝이며 오는 아침부터 지나가는 길손을 눈여겨보며 그대인가고 그대인가고 ㅡ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 꽃신 서정춘 어느 길 잃은 여자아이가 한 손의 손가락에 꽃 신발 한 짝만을 걸쳐서 들고 걸어서 맨발로 울고는 가고 나는 그 아이 뒤 곁에서 제자리걸음을 걸었습니다 전생 같은 수수 년 저 오래전에 서럽게 떠나버린 그녀일까고 그녀일까고 ―시집『귀』(황금이삭, ..

왜 시가 읽히지 않을까 /이재무

왜 시가 읽히지 않을까 /이재무 시가 읽히지 않는 이유로는 내외적 환경 변화를 들 수 있다. 우선 외적으로는 매체 환경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첨단 문화 매체에 의해 우리 나날의 일상이 전 방위적으로 포섭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기술 매체에 중독되어 하루 한시도 인터넷과 휴대전화에서 떨어져 살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즉,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들은 게임에 빠져 지내기 일쑤고 장년층들도 카톡, 페이스북, 트윗 등 SNS에 의존하지 않고는 나날의 무료를 견뎌내기 어려운 형편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른바 전자 사막시대를 살아가는 현대판 유목민들은 홀로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며 각종 전자 기술 매체를 통해 타자와의 교감과 소통을 꿈꾸고 기대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

감자꽃 /이재무

감자꽃 이재무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피어 더욱 서러운 女子 자주색 고름 물어뜯으며 눈으로 웃고 마음으론 울고 있구나 향기는, 저 건너 마을 장다리꽃 만나고 온 건달 같은 바람에게 다 앗겨버리고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비탈 오지에 서서 해종일 누구를 기다리는가 세상의 모든 꽃들 생산에 저리 분주하고 눈부신 생의 환희 앓고 있는데 불임의 女子, 내 길고긴 여정의 모퉁이에서 때묻은 발목 잡고 퍼런 젊음이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내 女子, 노을 속 찬란한 비애여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피어 더욱 서러운 女子 -시집『위대한 식사』(세계사. 2002) 감자는 밀과 벼, 옥수수와 함께 세계 4대 작물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약 7천 년 전 페루 남부에서 재배를 시작했고 남미 원주민들에게 주식이었다고 한..

소주병 /공광규

소주병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ㅡ시집『소주병』(실천문학사, 2004) -------------- 다리를 다쳐 거의 2년 정도 산을 못 다니다가 2년을 또 혼자서 외롭게 홀로 산을 다닌 적이 있었다. 혼자 산행을 하다보면 의외로 혼자 산행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는데 혼자 산행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우선 홀가분하다. 약속도 시간제약도 없으니 코스 변경도 그 날의 컨디션에 따라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발길 닿는 대로 갈 수도 있다. 또 하나 좋은 점은 나뭇잎 흔들리는 바람 소리, 여러 새가..

이문재 -해남길, 저녁 /마음의 오지 /뻐꾸기는 울어야 한다

해남길, 저녁 이문재 먼저 그대가 땅끝에 가자고 했다 가면, 저녁은 더 어둔 저녁을 기다리고 바다는 인조견 잘 다려놓은 것으로 넓으리라고 거기, 늦은 항구 찾는 선박 두엇 있어 지나간 불륜처럼 인조견을 가늘게 찢으리라고 땅끝까지 그대, 그래서인지 내려가자 하였다 그대는 여기가 땅끝이라 한다, 저녁 놀빛 불려놓은 바다의 남녘은 은도금 두꺼운 수면 위로 왼갖 소리들을 또르르 또르르 굴러다니게 한다, 발 나래 뱃소리 가르릉거리고 먹빛 앞섬들 따끔따끔 불을 켜대고, 이름 부르듯 먼 데 이름을 부르듯 뒷산 숲 뻐꾸기 운다 그대 옆의 나는 이 저녁의 끄트머리가 망연하고 또 자실해진다, 그래, 모든 끝이 이토록 자명하다면야, 끝의 모든 것이 이땅의 끝 벼랑에서처럼 단순한 투신이라면야 나는 이마를 돌려 동쪽 하늘이나 ..

뻐꾸기는 울어야 한다 /이문재

뻐꾸기는 울어야 한다 이문재 초록에 겨워 거품 물까 봐 지쳐 잠들까 봐 때까치며 지빠귀 혹여 알 품지 않을까 봐 뻐꾸기 운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은 뻐꾸기가 할 일은 할 수 있는 일은 울음으로 뉘우치는 일 멀리서 울음소리로 알을 품는 일 뻐꾸기 운다 젊은 어머니 기다리다 제가 싼 노란 똥 먹는 어린 세 살 마당은 늘 비어 있고 여름이란 여름은 온통 초록을 향해 눈멀어 있던 날들 광목천에 묶여 있는 연한 세 살 뻐꾸기 울음에 쪼여 귓바퀴가 발갛게 문드러지던 대낮들 그곳 때까치 집, 지빠귀 집 뻐꾸기가 떨어뜨려 놓고 간 아들 하나 알에서 나와 운다 뻐꾸기 운다 ―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이가서,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