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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해남길, 저녁 /마음의 오지 /뻐꾸기는 울어야 한다

흰구름과 함께 2024. 3. 26. 10:26

해남길, 저녁

 

이문재 

 


먼저 그대가 땅끝에 가자고 했다
가면, 저녁은 더 어둔 저녁을 기다리고
바다는 인조견 잘 다려놓은 것으로 넓으리라고
거기, 늦은 항구 찾는 선박 두엇 있어
지나간 불륜처럼 인조견을 가늘게 찢으리라고
땅끝까지 그대, 그래서인지 내려가자 하였다


그대는 여기가 땅끝이라 한다, 저녁 놀빛
불려놓은 바다의 남녘은 은도금 두꺼운
수면 위로 왼갖 소리들을 또르르 또르르
굴러다니게 한다, 발 나래 뱃소리 가르릉거리고
먹빛 앞섬들 따끔따끔 불을 켜대고, 이름 부르듯
먼 데 이름을 부르듯 뒷산 숲 뻐꾸기 운다
그대 옆의 나는 이 저녁의 끄트머리가 망연하고
또 자실해진다, 그래, 모든 끝이 이토록
자명하다면야, 끝의 모든 것이 이땅의 끝
벼랑에서처럼 단순한 투신이라면야


나는 이마를 돌려 동쪽 하늘이나 바라다 보는데
실루엣을 단단하게 잠근 그대는 이 땅끝에 와서
어떤 맨처음을 궁리하는가 보다, 참 그러고 보니
그대는 아직 어려서, 마구 젊기만 해서
이렇게 후욱―― 비린내나는 끝의 비루를
속수한 것들의 무책을 모르겠구나
모르겠는 것이겠구나

 

 


―시집『마음의 오지』(문학동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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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오지​

이문재


탱탱한 종소리 따라나가던
여린 종소리 되돌아와
종 아래 항아리로 들어간다
저 옅은 고임이 있어
다음날 종소리 눈뜨리라
종 밑에 묻힌 저 독도 큰 종
종소리 그래서 그윽할 터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머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

 

―시집『마음의 오지』(문학동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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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는 울어야 한다

 

이문재

 

 

초록에 겨워
거품 물까 봐
지쳐 잠들까 봐
때까치며 지빠귀 혹여 알 품지 않을까 봐
뻐꾸기 운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은 뻐꾸기가
할 일은 할 수 있는 일은
울음으로 뉘우치는 일
멀리서 울음소리로 알을 품는 일
뻐꾸기 운다


젊은 어머니 기다리다
제가 싼 노란 똥 먹는 어린 세 살
마당은 늘 비어 있고
여름이란 여름은 온통 초록을 향해
눈멀어 있던 날들
광목천에 묶여 있는 연한 세 살
뻐꾸기 울음에 쪼여 귓바퀴가
발갛게 문드러지던 대낮들


그곳 때까치 집, 지빠귀 집
뻐꾸기가 떨어뜨려 놓고 간 아들 하나
알에서 나와 운다
뻐꾸기 운다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이가서, 2006)

출처: https://cloudleisurely.tistory.com/1038 [하얀구름 따라 유유자적(시, 기사 외 펌 금지):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