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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호 오민석/ 경계 혹은 사이의 시학

흰구름과 함께 2024. 2. 17. 10:56

경계 혹은 사이의 시학

― 하기정의 디카시 읽기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명예교수)

 

근 20년 전 조심스레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 명함을 내밀었던 디카시는 이제 독립 장르로서 제 자리를 거의 굳히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전국의 수많은 아마추어 동호인들이 생활 문학으로서 디카시를 열심히 배우고 즐기고 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디카시를 잘 모르거나 뜨악해 하던 전문 시인들이 디카시 창작의 최전선으로 점점 더 많이 입성하고 있다. 미디어 인프라의 변화가 예술 형식의 변화에 미치는 영향은 수천 년 예술의 역사가 증명해왔다. 이런 점에서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맥루한H. M. Mcluhan의 주장은 과장이 아니다. 미디어는 형식이자 수단이면서 동시에 내용이자 메시지이다. 미디어는 인간의 감성을 바꾸고, 생각을 변화시키며, 가치의 위계를 재배열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디어는 그 자체 이미 세계관이며 메시지이다. 맥루한은 또한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the extension of man”이라 규정하였다.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과 더불어 인간의 능력과 세계도 깊어지고 넓어진다. 가령 자동차는 발의 확장이고, 망원경은 눈의 확장이며, 컴퓨터는 뇌의 확장이다.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과 더불어 인간의 발은 자동차처럼 빨라졌고, 눈은 망원경처럼 멀리 보게 되었으며, 뇌는 컴퓨터처럼 복잡한 정보의 처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미디어는 이렇게 인간의 능력을 끝없이 확장한다. 디지털카메라가 휴대전화 안으로 들어오면서 사진찍기는 누구나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미디어 환경의 이런 변화와 더불어 시인들은 문자 미디어에 더하여 디지털카메라라는 ‘확장된 일상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 시인들은 이제 간편한 카메라(휴대전화)로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사진으로 이미지를 포착하고 그것을 문자텍스트에 접속시킴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감각을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디카시는 그 자체 (기존의) 시도 아니고 사진도 아니며, 그런 ‘장르들 너머의 장르’이다. 디카시는 시각 이미지와 문자 이미지 ‘사이’의 예술이며, 사진과 문자의 접속점에서 발생하는 화학적 불꽃이다.

디카시가 이렇게 사이의 예술이라면 하기정 시인의 디카시는 사진과 문자라는 거대한 사이에서 또 다른 사이를 사유하는 ‘경계 혹은 사이의 시학’이다. 모든 경계에서 사건이 일어난다. 사이와 경계에서 서로 다른 힘과 방향과 속도가 만난다. 모든 사건은 이질적인 것들이 마주쳐 만드는 불꽃들이다.

 

여름의 붉은 구름과 푸른 온도

함구하는 미래의 주머니 안에

한껏 부풀었다 터지는

―「꽈리」 전문

 

부풀어 오른 꽃주머니(“꽈리”)는 그것을 보는 존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부풀어 오른 저 안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무엇이 빠져나가서 저 주머니는 다시 찌그러졌을까?’ 이 직접적인 자극들은 오로지 그것의 시각 이미지(사진)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탐스러운 꽈리를 푸른 접시 위에 올려놓은 사진을 통하여 정확히 이런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작품은 그런 질문에 대한 시인의 대답이다. 시인이 볼 때, 꽈리는 “여름의 붉은 구름과 푸른 온도” 때문에 부풀어 올라 있다. 꽈리가 붉은 이유는 그 안의 “붉은 구름” 때문이고, 접시가 푸른 이유는 그 안의 “푸른 온도”가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꽈리의 안이 이렇게 밖으로 쏟아지기 전에 꽈리는 “미래”를 “함구하는” “주머니”이다. 꽈리는 그 자체 신비와 비밀로 부풀어 오른 아름다움이다. 보이지 않게 주머니 안에 담고 있는 그 무엇이 꽈리의 미적 풍요를 가능케한다. 그것은 꽃이면서 열매이고 열매이면서 꽃이며, 그 어느 것도 아니고 동시에 그 어느 것이면서 미래를 “함구”한다. 주렁주렁 매달린 주머니들은 붉은 열차의 신비한 객실들 같다. 그 객실엔 무슨 보물이 그리 많길래 저렇게 터질 듯 부풀어 올랐을까. 이런 점에서 예술은 신비에 대한 기억이다. 조르조 아감벤G. Agamben의 말처럼 “문학 장르”가 “신비의 망각이 언어를 할퀴면서 만들어 내는 상처”라면, 디카시는 신비의 망각이 사진과 문자를 동시에 할퀴며 만들어 내는 상처이다. 이 작품은 꽃주머니의 안과 밖, 붉고 푸른 신비의 안과 밖, 그 사이와 경계에서 핀 꽃이다.

 

달방에 들었다

그믐과 그믐 사이

하현달과 상현달 사이

달방에 누워 등에 배기는 것들을 생각했다

―「새벽달」 전문

 

삼각형들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구도, 옅은 푸른색과 검은색으로 분할된 공간은 칸딘스키W. Kandinsky의 추상적 표현주의 작품들을 연상케 한다. 단순화된 선들은 마치 서치라이트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독자들의 시선을 새벽달로 고정한다. 그 순간 추상의 미학은 깨지고 리얼리즘의 창이 열린다. “새벽달”이란 제목이 없었다면 이 달은 다른 이름으로 상상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사진 속의 달에 “새벽”의 시점時點을 부여하면서 ‘사이의 시간성’을 사유하기 시작한다. 위 작품의 문자텍스트는 그런 시간성에 대한 사유로 가득하다. 우선 위 작품의 달은 시적 화자가 “달방”에서 포착한 것이다. 화자의 거주 행위는 월별로 체크된다. 화자는 매월 한 번씩 월세를 내며 월 단위로 거주 행위를 이어 나간다. 그의 삶은 늘 “그믐과 그믐 사이/ 하현달과 상현달 사이”에서 존재한다. 그는 달방에 누워 “등에 배기는 것들을 생각”한다. 등에 배기는 것들은 사이-시간들의 문턱에 존재하는 삶의 주름들이다. 삶은 주름을 이루며 펼쳐지고, 주름과 주름이 만나는 지점은 삶의 통점痛點을 이룬다.

 

한때, 라는 이름의 담장 너머

맨발로 담을 넘으려 한 적이 있다

푸른 발뒤꿈치를 유리조각에 베이며

―「유리 담장」 전문

 

이 작품에서도 화자는 안과 밖의 경계에 서 있다. 담은 그것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마주치는 긴장의 공간이다. 담의 이름이 “한때”이므로 담으로 나누어지는 경계도 시간으로 구성된다. 하기정 시인에게 존재는 시간에 의해 측정되고 구성된다. 시간은 존재를 ‘~되기’의 도상에 얹어놓는다. 시인은 상처 입을 것을 각오하며 맨발로 “유리 담장”을 “넘으려 한” 시절을 회고한다. “유리 담장”이란 사진상으로는 깨진 유리가 꽂혀 있는 담장을 가리키지만, 유리처럼 투명하여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담장, 그리하여 뻔한 담장이라는 뉘앙스를 갖기도 한다. 몸을 벨 수도 있는 위험한 담장은 언제든 별 볼 일 없는 담장일 수도 있다. 담의 이쪽과 저쪽이 있는 것처럼, 유리 담장의 의미는 양가적이다. 그것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담에는 굵은 금이 가 있다. 금은 이쪽과 저쪽의 경계와 차이를 지우는 구멍이다. 게다가 담장 위에는 푸른 하늘이 막힘없이 펼쳐져 있다. 담장을 넘고 넘지 않음의 차이는 오로지 담장의 높이라는 경계 안에서만 유효하다. 그 너머에선 그런 구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화자가 젊은 시절 “푸른 발뒤꿈치를 유리 조각에 베이며” 저 담을 넘었던들 저 높은 곳의 기준으로 보면 그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물론 정반대일 수도 있다. 담 아래와 담 위의 세계가 다른 것처럼 삶과 세계는 단일한 규정을 거부한다.

 

주인공과 배경의 사이

보색과 배색 사이

간격을 공증하러 날아가는 일

―「호랑나비의 은유」 전문

 

화자는 여전히 무엇과 무엇의 “사이”에 있다. 사이, 즉 경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은유”란 이질적인 것들의 사이에서 그 “간격을 공증”하는 일이다. 호랑나비는 “주인공과 배경”의 경계를 섞고, “보색과 배색”의 사이를 뛰어넘는다. “보색”은 두 색이 섞일 때 한 색의 느낌이 서로 다른 색의 영역에 남는 현상을 만든다. 배색은 서로 다른 색깔이 서로 잘 어울리게 섞여 만들어진 색을 말한다. 존재는 다른 것과의 관계와 차이를 통하여 의미를 발생시킨다. 관계와 차이를 생성하려면 사물들은 서로 만나 경계 혹은 사이를 만들어야 한다. 두 면이 만나는 접점에서 관계와 차이가 생겨난다. 세계는 서로 다른 점과 점들, 선과 선들, 면과 면들, 공간과 공간들이 만나서 이룬 주름들이다. 접속의 자리에서 생겨나는 무수한 내러티브들이 세계를 구성한다. 시인은 존재들이 저절로 만나지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시인은 멈춰 있는 존재들을 먼저 건드려 부딪히게 만든다. 위 디카시의 “호랑나비”는 그러므로 은유를 수행performance하는 시인의 은유로 읽어도 된다. 시인은 사물과 존재와 세계들이 자연스레 만나기도 전에 그것들의 머리통을 붙잡아 박치기시킨다. 이 억지 등치, 존재의 이 갑작스러운 배열이 은유이고 시이다.

 

벽의 높이와 벽돌의 무게와 알전구들이

몇만 볼트인지 감이 오는감?

―「견디는 힘」 전문

 

위트의 언어에 쌓여 있지만, 위 작품은 세계의 무게에 압도된 화자의 넋두리로 들어도 된다. 세계는 이질적인 것들이 앞뒤로, 위아래로, 좌우로 겹치고 겹쳐 만들어진다. 한 편의 풍경 안에는 얼마나 많은 것들의 이질적인 관계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 이어체異語體heteroglot들이 만나는 지점에선 또 얼마나 많은 차이들의 불꽃이 일어나는가. 벽돌이 모여 벽을 만들고, 한 방향의 벽이 다른 방향의 벽과 만난다. 벽의 방향과 힘과 속도가 창문의 자리에서 멈춘다. 창문은 벽의 밀도에 구멍을 내고 충만한 존재를 비존재의 허공과 만나게 한다. 모든 벽의 너머엔 무한 창공이 있다. 창공은 무게 없음의 무게로 풍경에 의미를 더한다. 그 막막한 우주의 가슴에 붉은 “알전구들”을 가득 단 나무가 서 있다. 나무의 뿌리는 벽 아래의 땅을 향하고 나무의 가지들은 무한 창공의 빈 공간에서 흔들린다. 게다가 똑같은 나무, 똑같은 가지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들은 지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방향으로 손을 뻗고 하늘과 교신한다. 교신의 어떤 성숙한 시간에 나무의 가지마다 수만 볼트의 “알전구들” 불이 들어온다. 이 어마어마한 세계와 존재의 무게와 크기를 제발 좀 알라고, 화자는 능청스레 묻는다. 저것들이 모두 모여 “몇만 볼트인지 감이 오는감?” “오는감”은 ‘오는가’의 의도적 오류이다. 시인은 저 수만 볼트의 알전구들이 감-알전구라는 것을 장난스레 강조하고 있다. ‘느낌이 오는가?’라고 말해도 될 것을 “감이 오는감?”이라고 “감”을 이중 발화함으로써 시인은 어마어마하게 열린 감-알전구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위 디카시에서 시인의 시선이 가장 많이 집중된 것은 회색 벽도 푸른 하늘도 아닌 감나무, 그중에서도 무수한 붉은 감들이다. 나머지 구성물들은 감-알전구들의 전압을 최대한 올리기 위하여 동원된 부속물들에 불과하다. 보라, 시간의 최고 성숙기에 수만 볼트의 전압으로 불을 밝힌 저 자연의 “알전구들”을.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하기정의 디카시들은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접속하고 교차하는 경계와 사이의 자리에 집중하고 있다. 하기정은 모든 사건이 서로 다른 것들의 경계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가 볼 때 시는 이질적인 것들의 자연스러운 접촉을 기다리지 않는다. 시는 그것들이 만나기도 전에 강제로 박치기시켜 그 안에서 듣도 보도 못한 최초의 유사성을 찾아낸다. 시인은 “호랑나비”처럼 이 꽃과 저 꽃을 넘고, 이 담과 저 담을 넘어, 이질적인 것들의 “간격을 공증”한다. 그리고 외친다. ‘보라, 이것들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모두 만나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다.’

 

 

 

오민석 충남 공주 출생. 1990년 《한길문학》 등단.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 학평론 당선.

시집 『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외. 문학평론 집 『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 외. 시와경계 문학상 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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