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과 사진/수필

생활의 길목에서 4―임신 4

흰구름과 함께 2023. 2. 21. 09:31

생활의 길목에서  4

 

―임신 4

 

 

   아내가 족발을 그렇게 먹고 싶어 했지만 사주지 못했던 이유는 아주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내가 족발에 대해서 상당히 안 좋은 이미지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서 족발을 한 번도 먹어 본 적은 없었지만 만드는 과정을 많이 본 적은 있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직장은 동대문운동장 뒤편에 있는 신당동 시장 근처에 있었다. 그래서 항상 시장을 지나가야 했는데 거기에는 언제나 머리 고기와 족발을 팔고 있었는데 족발 만드는 과정이 영 위생적이지 않아서 모든 족발을 저렇게 만드는 줄 알았다.

 

   시장 건물 옥상에서 돼지 발을 잔뜩 쏟아 부어 놓고는 부탄가스로 돼지 다리 털을 그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주위 환경이 상태가 지저분하고 아주 더러웠다. 게다가 무슨 기름인지는 모르나 거기에 넣고 끊이는데 튀기는 건지 삶는 건지 냄새 또한 맡기가 역겨울 정도였다. 털 타는 냄새와 끊이는 냄새는 바람을 타고 일하고 있는 곳으로 솔솔 날아 들어와서 냄색을 맡는 것이 고역이었다.

 

   시각과 후각이 거부하고 위생 상태마저 좋지 않은 장소에서 족발의 탄생?을 보았으니 내가 먹는 것도 그런데 그런 음식을 산모에게 먹으라고 사다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그런 음식을 차마 먹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내의 볶아대는 등살에 사 주고 싶다가도 그때의 이미지와 잠재 속에 배여 있는 냄새는 결국 족발을 안 사게 하는 힘이 되고 말았다.

 

   결국은 내 고집이 이겼지만 이기고도 이긴 것이 아니었다. 항상 마음속에 빚이 되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모른 척 양보하고 사주어도 되었을 텐데 그 당시는 정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육체는 언제나 마음의 노예. 육체는 가려고 하나 마음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리고 세월이 조금 흘러 어떤 모임에 나갔었는데 누가 족발을 시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족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내심 찝찝해서 손도 안 되고 눈으로만 시식을 하고 있었는데 어찌 그 가게의 족발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보기에도 크고 먹음직스럽게 보였고 실제로 먹어 보니 살코기가 붙어 있는 부위는 내 입맛에도 거부감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날 당장 족발을 시켜서 아내한테 대령하였지만 이미 애는 태어난 지 몇 개월이 지난 뒤였다. 하지만 아내는 그래도 족발을 아주 맛있게 정말 맛있게도 잘 먹었다. 진작 사 줄 걸 마음속에 그늘이 졌지만 후회는 항상 늦는 것이 아닌가. 아내는 살코기보다 껍질 있는 부분이 졸깃졸깃 한 게 더 맛있다고 하였다. 그 뒤에도 나는 죄? 값을 치르느라 몇 번의 족발을 더 시켜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족발 안 먹은지 오래 되었다. 아내가 더 이상 족발 타령을 안 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셋째를 임신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일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음식을 먹을 때만 아내가 임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먹다가도 갑자기 욱하며 돌아서서 토하고, 토하고 나면 바로 또 돌아서서 음식을 먹는다. 참 신기하기도 했지만 더 신기한 것은 몇 달이 지나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무 음식이나 잘 넘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아내는 본격적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는데 잡식성이라 하면 좀 우습기는 하지만 식성의 문제일 뿐이지 사람의 이 구조가 육류나 채소를 다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하니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골고루 음식을 섭취한다면 태아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원래 임신 중에 감기에 걸리면 약을 함부로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아주 조심을 해야 하는데 감기에 걸렸을 때도 아내는 쌍화탕 한 병도 절대로 먹지 않았다. 감기가 심해 목이 부어 말이 제대로 안 나와도, 약사가 쌍화탕 정도는 괜찮다고 해도 집에 오면은 먹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먹는 음식만큼은 가리지 않았다. 육류보다 채소를 좋아 했지만 특별히 골라서 먹지는 않았다. 그중에서 해물탕은 우리 집 외식 1호의 음식이었다.

 

    아내의 요청으로 먹기도 하였지만 두 애들도 상당히 잘 먹었기 때문에 우리 집 식구 모두 다 잘 먹는 음식이었다. 건더기를 다 건져 먹고 나면 국물을 조금 넣고 신김치와 김과 밥을 섞어 볶아서 먹기도 했다. 해물탕 다음으로는 삼계탕도 많이 먹었다. 삼계탕집에도 자주 갔는데 나중에는 아내가 외출하기 힘들어해서 포장해서 많이 사다 나르기도 했다.

 

   집 근처에서 그렇게 멀지 않는 재래시장에 삼계탕집이 있는데 다른 가게보다 천 원 이천 원 비싸게 받았다. 그러나 그 집 삼계탕이 맛이 있어서 애를 낳고 나서도 자주 갔었다. 엄마의 배 속에 있을 때 맛을 봐서 그런지 세째도 커서 그 집 삼계탕을 아주 잘 먹었다.

 

   먹는 음식은 잘 먹었지만 날이 갈수록 아내의 몸은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부은 것 같고 힘이 들어 보였다. 혹시 뱃속에 사내아이를 갖고 있어서 그런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고 나이 사십이 다 돼 힘이 드는가 그렇게 생각을 했지 무슨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를 않았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아내의 부종은 점점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