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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금(純金)의 아침에 나는 /정진규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

흰구름과 함께 2024. 2. 5. 13:40

이 순금(純金)의 아침에 나는


정진규

 

 

자네여,
순금의 빛살의 꼬리를 달고
으리으리 해라!
눈부시게 밝아오는 세종로의, 을지로의, 효장도 --- 의 아침을
걸어가면
어디선가 한번쯤 마주쳤을 눈동자들이
저마다 아낌없이 깨끗한 미소를 보내어 주며 마구 손을 내어 잡는데
자네여,
미소하는 모든 눈동자 속에 내어 미는 모든 손길 속에,
너는 살아서 스며있구나.


자유를 말하면서도 자정의 언덕만을 배회하던 인간들의 비굴을
너는 무너뜨리고
피 젖은 몸을 눕혀, 시신을 눕혀,
너는 자유의 교량.
잃었던 우리의 영토에로 우리를 인도하고
다시 우리를 행복한 꿈으로 영원으로 인도하여


우울했던 우리의 도시, 공원의 풀밭에, 나무 가지 가지마다에
거리의 가로수가지 가지마다에
사월이 싣고 온 소생(甦生)의 짐마차들은 신선하게 풀어놓은 그 다음의
푸르디 푸른 풀잎들을 보이게 하는
축복 받은 건강한 이파리들을 보이어 주는
지금 자네의 순금의 목청,
푸른 하늘가에 퍼져 울리는 나팔소리라든가
행복의 잔치를 위하여 분주히 드나드는 아낙네들의 지꺼림 소리,
웃음소리를 듣게 하는 자네여.


너는 살아서 스며있구나,


오늘 여기
저렇게 아낙네들로 하여금 마련되는 잔치의 음식들이
자네의 구미에 참으로 맞을는지 그게 사뭇 걱정이다. 나는


체념에 약아빠져 그리도 변명에 익숙했던 노인네들이
어쩔 수 없어 마련하는 잔치가 아니 이기를
참된 참회의 기도이기를
그날 너와 더불어 피를 보던, 종래는 네 피마져 보아야 했던
세종로의, 을지로의, 효자동 --- 의 가슴 깎던 아픔 보담도 더한
응시가 엄숙하게 나의 내부에서 싹트고 있음을 나는 안다.
"그래야 너는 고이고이 잠들 수 있지 않으리 ---"


이 순금의 아침에
우리 한강 가의 그 숱한 모래알 하나, 하나에서도
살아 눈뜨고 있을 자네여,
천의 천, 만의 만년을, 강물 속에 우리의 한강에 스미어 흐를
자네여
이 순금의 아침에 나는,
네가 고이 잠들 수 있기만을
오늘의 잔치가 순수한 참회의 음식이기만을 기원하는 것이다.
자네여.

 

 

  


☆ 이 시의 작자는 4.19 당시 고려대학교 국문과 학생으로, 이 시는 앞의 시집 [뿌린 피는 영원히]에 수록되어 있다.

 

 

 

4·19 학생혁명추도시집 <뿌린 피는 영원히>(1960, 5월 19 발행)

가져온 곳 :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gcpoet&logNo=104105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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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 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순간만큼 잠시
멈추어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의 생각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 스톱도 급행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개 짓,


지난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 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의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는 눈 내린 숲속으로 빨려가고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 가운데
겨울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가져온 곳 : 이 아침의 시>
http://www.mhj21.com/sub_read.html?uid=8244§ion=section37§ion2=
기사입력: 2009/01/02 [15:20]  최종편집: ⓒ 문화저널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