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글 -좋은 시 문학상 건강 여행 뉴스 신문 기사 글

첫사랑 시 모음 -

흰구름과 함께 2024. 2. 5. 13:28

첫사랑 시 모음 -

 

첫사랑은 곤드레 같은 것이어서

 

김남극

 

 

내게 첫사랑은
밥 속에 섞인 곤드레 같은 것이어서
데쳐져 한 계절 냉동실에서 묵었고
연초록색 다 빠지고
취나물인지 막나물인지 분간이 안 가는
곤드레 같은 것인데


첫사랑 여자네 옆 곤드레 밥집 뒷방에 앉아
나물 드문드문 섞인 밥에 막장을 비벼 먹으면서
첫사랑 여자네 어머니가 사는 집 마당을 넘겨보다가


한때 첫사랑은 곤드레 같은 것이어서
햇살도 한 평밖에 몸 닿지 못하는 참나무숲
새끼손가락만한 연초록 대궁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까실까실한,
속은 비어 꺾으면 툭 하는 소리가
허튼 약속처럼 들리는
곤드레 같은 것인데


종아리가 희고 실했던
가슴이 크고 눈이 깊던 첫사랑 그 여자 얼굴을
사발에 비벼
목구멍에 밀어 넣으면서
허기를 쫓으면서

 

 

―『유심』(2003. 봄)
시집『하룻밤 돌배나무 아래서 잤다』(문학동네, 2008)

 

----------------------------

낙화, 첫사랑

 

김선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일간『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49』(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지성사,2007)

 

 

--------------------------

첫 사랑


괴테

 


아아 누가 돌려 주랴, 그 아름다운 날
첫 사랑의 그 때를.
아아 누가 돌려 줄 것이랴.
그 아름다운 시절의
다만 한 토막이라도.


쓸쓸히 나는 이 상처를 키우며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슬픔에
잃어진 행복을 슬퍼하고 있으니,
아아 누가 돌려 주랴, 그 아름다운 나날
첫사랑의 그 즐거울 때를

 

 

 ---------------------------- 

마음 변한 소녀

 

괴테

 


노을진 햇빛을 온몸에 받으면서
조용히 숲 언저리를 걸어가노라니
다몬이 앉아서 피리 불고 있었지.
그 소리 바위 틈에서 울리는 듯
솔 랄 라!


그는 나를 제 곁에 끌어 당기더니
부드럽고 달콤하게 입 맞추었지.
그에게 말하기를 "좀더 불어요!"
그이는 다시금 피리를 불었지
솔 랄 라!


내 마음에 침착함은 사라져 버렸고
내 기쁨도 멀리로 도망가고 말았지.
이제금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다몬이 부는 피리소리뿐이라네.
솔 랄 라! 레 랄 라.

 

 

 

---------------------------

이별


괴테

 

 

입으로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이별을
내 눈으로 말하게 하여 주십시오!
견딜 수 없는 쓰라림이 넘치오!
그대로 어느 때는 사나이었던 나였건만.


상냥스러운 사랑의 표적조차
이제는 슬픔의 씨앗이 되었고
차갑기만 한 그대의 입술이여
쥐여 주는 그대의 힘없는 손이여.


여느 때라면 살며시 훔친 입 맞춤에조차
나는 그 얼마나 황홀해질 수 있었던가.
이른 봄 들판에서 꺾어 가지고 온
그 사랑스런 제비꽃을 닮았었으나.


이제부터는 그대 위해 꽃다발을 엮거나
장미꽃을 셀 수조차 없게 되었으니,
아아 지금은 정녕 봄이라는데 프란치스카여
내게만은 쓸쓸하기 그지없는 가을이라오.

 

 

 

김희보 편저『世界의 名詩』(종로서적, 1987)

--------------------

첫사랑

          문숙

 


공사중인 골목길
접근금지 팻말이 놓여있다
시멘트 포장을 하고
빙 둘러 줄을 쳐 놓았다
굳어지기 직전,
누군가 그 선을 넘어와
한 발을 찍고
지나갔다

 

너였다

 


-시집『단추』(천년의시작, 2006)

 

 

 

첫사랑

        문숙

 

 

잠깐 냉동실에 보관했던 방아잎 때문에
구운 생선에서도 볶은 멸치에서도 온통 방아잎 냄새다
여기저기 향기가 범람한 흔적
꽝꽝 얼어붙은 속을 얼마나 깊게 파고들었는지
굽고 튀기고 볶아도 없어지지 않는다
남아 있는 냄새에 걸려 자꾸 울컥거린다
네가 나를 다녀가서 생긴 일이다
 

 

-격월간『시를사랑하는사람들』(2010, 11-12)

 

-------------------

첫사랑


박남철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 안에서 늘 새침했던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포항여고 그 계집애
어느 날 누이동생이
그저 철없는 표정으로
내 일기장 속에서도 늘 새침하던
계집애의 심각한 편지를
가져왔다.


그날 밤 달은 뜨고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엔 정말 계집애가
교복 차림으로 검은 운동화로
작은 그림자를 밟고 여우처럼
꿈처럼 서 있었다 나를
허연 달빛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얻어맞았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눈물도 안 흘리고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날 밤 달은 지고
그 또 다른 허연 분노가
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
나를 함부로 깎으면서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자꾸 책상 모서리를
눈물을 흘리며 책상 모서리를
깎아댔다.

 

 

 

(『지상의 인가』.문학과지성사. 1984)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

첫사랑


김성덕

 


유통기한이 우유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의 첫사랑에도 있었답니다


기한이 지난 우유를 마시면
영락없이 배탈 나듯이
첫사랑도
내게 머물 기간이 끝났는지
어느 날, 훌쩍 내 곁을 떠나간 뒤
불면의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향기는 꽃잎 따라 피고 지던데
그리움은
첫사랑 따라 오기만 하고
그 사랑이 떠난 후에도
오래 오래 가슴 속 깊이 머뭅니다

 

 


-시집『동산바치의 사랑』(현대시문학, 2007)

 

------------------

그 여자네 집

 

김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에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는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려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치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그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그 여자네 집』.창작과비평사. 1998)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

첫사랑

 

진은영

 

 

소년이 내 목소매를 잡고 물고기를 넣었다

내 가슴이 두마리 하얀 송어가 되었다

 

세마리 고기떼를 따라

푸른 물살을 헤엄쳐 갔다

 

 

 

-시집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 (이가서,2011)

 

-----------------

첫사랑

 

지디마자(吉狄馬加)

 

 

어린 시절 어른들은 말했네

아이들의 얼굴은 모두 둥글다고

엄마에게 왜냐고 물었더니

그저 손가락으로 달님만 가리키셨지

그 달은 정말 둥글었네, 나뭇가지 끝에 고요히 잠든 모습에

나는 동생의 잠자리채를 떠올렸네

어떻게 하면 저런 어여쁜 색시를 채 올까

그때 지붕 밑엔, 황금빛 옥수수 다발이 가득 걸려 있었지

나는 소녀의 목걸이가 생각났네

나무 밑에서 놀던 숨바꼭질

달빛 아래 놀던 *‘신부 채기’

왜 그랬을까, 내가 찾아다닐 때마다

그녀는 살금살금 다가와

물 같은 달님이 되었지

그녀의 웃음소리가 내 옷을 흠뻑 적셨어

어느 날 그녀는 백양나무로 뻗어나

들판에서 사랑을 노래했네

 

그녀가 꽃 안장 위에 올라탔을 땐

나의 신부가 아니었어

그날 밤, 엄마는 내가 어른이 되었다며

못 입게 된 작은 옷들을

동생에게 주라고 하셨지

그러나 나는

웃음소리에 젖었던 그 옷만은

숨겨두었네

그날 밤의 달빛을 찾아다녔지만

오직 나의 영혼 속에 있을 뿐

나는 동생의 잠자리채를 떠올렸네

어떻게 하면 저런 어여쁜 색시를 채 올까

 

 

 

―장석남 시배달『사이버문학광장 문장』(2013년 9월 10일)
―백지운 옮김『시간』(문학과지성사, 2009)

 

-------------------

첫사랑

 

김용택


바다에서 막 건져올린
해 같은 처녀의 얼굴도
새봄에 피어나는 산중의 진달래꽃도
설날 입은 새옷도
아, 꿈같던 그때
이 세상 전부 같던 사랑도
다 낡아간다네
나무가 하늘을 향해 커가는 것처럼
새로 피는 깊은 산중의 진달래처럼
아, 그렇게 놀라운 세상이
내게 새로 열렸으면
그러나
자주 찾지 않은
시골의 낡은 찻집처럼
사랑은 낡아가고 시들어만 가네

이보게, 잊지는 말게나
산중의 진달래 꽃은
해마다 새로 핀다네
거기 가보게나
삶에 지친 다리를 이끌고
그 꽃을 보러 깊은 산중 거기 가보게나
놀랄걸세
첫사랑 그 여자 옷 빛깔 같은
그 꽃빛에 놀랄 걸세
그렇다네
인생은, 사랑은 시든 게 아니라네
다만 우린 놀라움을 잊었네
우린 사랑을 잃었을 뿐이네




ㅡ시집  『그래서 당신』(문학동네, 2006) 

 

---------------------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

 

천수호 

 


아버지는 다섯 딸 중

나를 먼저 지우셨다  


아버지께 나는 이름도 못 익힌 산열매  


대충 보고 지나칠 때도 있었고

아주 유심히 들여다 볼 때도 있었다  


지나칠 때보다

유심히 눌러볼 때 더 붉은 피가 났다  


씨가 굵은 열매처럼 허연 고름을 불룩 터뜨리며

아버지보다 내가 곱절 아팠다

 
아버지의 실실한 미소는 행복해 보였지만

아버지의 파란 동공 속에서 나는 파르르 떠는 첫 연인  


내게 전에 없이 따뜻한 손 내밀며

당신, 이제 당신 집으로 돌아가요, 라고 짧게 결별을 알릴 때  


나는 가장 쓸쓸한 애인이 되어  


내가 딸이었을 때의 미소를 버리고

아버지 연인이었던 눈길로  


아버지 마지막 손을 놓는다

  

 

 

―시집『우울은 허밍』(문학동네, 2014)

 

---------------------

첫사랑

 

 

고영민

 

 

 

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봄날 저녁이었다

 

 

그녀의 집 대문 앞에

빈 스티로폼 박스가

바람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밤새 저리 뒹굴 것 같아

커다란 돌멩이 하나 주워와

그 안에

넣어주었다

 

 

 

 

시인수첩(2015. )

시집구구(문학동네, 2015)

 

-----------------

첫사랑


서안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울고 있으면 따뜻해진다
누군가 흐린 발소리로 나를 다녀간다


불의 검은 뼈를 뽑아
나의 영혼을 꺾어 버렸다
심야버스가 지나간다
상처 같은 게 나 있다


뒤돌아보면
처음이란
언제나 캄캄하다


꽃이 피면 나는 꽃을 보내지 않겠다
이것은 결심에 가깝다


단순한 것을 아름답게 여기게 되었다

 

 


ㅡ『서정과현실』(2018, 하반기호)

 

-------------------

첫사랑

 

 이윤학

 

 

그대가 꺾어준 꽃,

시들 때까지 들여다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까지

 

 

 

시집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문학과지성사, 2000)

 

---------------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강은교 


봄이 오고 있다

그대의 첫사랑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의 맨발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이 밟은 풀잎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이 나부끼는 바람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 위의 아침 햇빛이 꿈꾼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 위의 반짝이는 소리

곁으로 곁으로 맴도는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의 꿈 엷은 살 속

으로 우리는 간다. 시간은 맨머리로

간다, 아무도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갈 뿐, 그러다 햇빛이

되어 햇빛 속으로 가는

그대와 오래 만나리

만나서 꿈꾸리

첫사랑 되리

 

 

 

―시집등불 하나가 걸어오네』(문학동네, 1999)

 

-------------------

첫사

 

서정춘

 

 

가난뱅이 딸집 순금이 있었다

가난뱅이 말집 춘봉이 있었다

 

순금이 이빨로 깨트려 준 눈깔사탕

춘봉이 받아먹고 자지러지게 좋았다

 

여기, 간신히 늙어 버린 춘봉이 입 안에

순금이 이름 아직 고여 있다

 

 

 

일간그림과 가 있는 아침(서울신문. 2015-07 11일 토요일)

시집물방울은 즐겁다(천년의시작, 2010)

 

-------------------

첫사랑

 

  이강하

   

 

  놀라운 미(美)의 ballroom이다. 세노테*의 햇살처럼 물길이 만들어낸 희귀한 석순처럼, 세월이 지나도 빛을 낸

다. 쉼 없이 서로를 에메랄드빛으로 학습한 노래, 황홀한물의 결집이다. 어떤 일이든 함께 공감할 때 서로의 존재

는 믿음을 먹고 더 높이 성장한다. 간혹 마음의 창문에 구멍이 뚫려 검은 바람이 들기도 하지. 그러나 이는 내 생각이 네 생각이기 전에 응고된 고독일 뿐, 완전한 함몰은 아니다.

 

  이별한 첫사랑은 잊을만하면 되살아난다. 푸른 운명의, 이보다 긴장된 역사는 없다. 나이를 모른다.

 

 

*세노테 : 낮은 편평한 석회암 지역에서 볼 수 있는 함몰 구멍에 하수가

모인 천연 우물이다.

 

 

 

 ― 동인시집『 봄시. 3집 』 (대일, 2014)

 

-------------

첫사랑 

 

고증식

 

 

너무 멀리 와버린 일이

한두 가지랴만

십오 년 넘게 살던

삼문동 주공아파트가 그렇다네

열서너 평 임대에

우리 네 식구 오글거리던,

화장실 문 앞에

세 끼 밥상 차려지고

어쩌다 쟁그랑쟁그랑 싸워도

자고 일어나면

바로 코앞에서 얼굴 맞대던,

이젠 쉬 돌아갈 수도 없는

거기, 마음의 집

 

 

 

 ―시집『하루만 더』(애지, 2010)

 

---------------

첫사랑


박남철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 안에서 늘 새침했던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포항여고 그 계집애
어느 날 누이동생이
그저 철없는 표정으로
내 일기장 속에서도 늘 새침하던
계집애의 심각한 편지를
가져왔다.


그날 밤 달은 뜨고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엔 정말 계집애가
교복 차림으로 검은 운동화로
작은 그림자를 밟고 여우처럼
꿈처럼 서 있었다 나를
허연 달빛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얻어맞았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눈물도 안 흘리고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날 밤 달은 지고
그 또 다른 허연 분노가
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
나를 함부로 깎으면서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자꾸 책상 모서리를
눈물을 흘리며 책상 모서리를
깎아댔다.

 

 

 

―시집『지상의 인가』.(학과지성사. 198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

첫사랑


김성덕

 


유통기한이 우유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의 첫사랑에도 있었답니다


기한이 지난 우유를 마시면
영락없이 배탈 나듯이
첫사랑도
내게 머물 기간이 끝났는지
어느 날, 훌쩍 내 곁을 떠나간 뒤
불면의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향기는 꽃잎 따라 피고 지던데
그리움은
첫사랑 따라 오기만 하고
그 사랑이 떠난 후에도
오래 오래 가슴 속 깊이 머뭅니다

 

 


―시집『동산바치의 사랑』(현대시문학, 2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