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과 사진/수필

생활의 길목에서 9 ―입원 4

흰구름과 함께 2023. 2. 23. 10:29

생활의 길목에서 9

 

  입원 4

 

 

  무엇 때문인지 영문을 몰라 쳐다만 보고 있자 이번에는 나직한 목소리로 다시 부른다.

  "잠깐만 이리 들어와 봐"

  병실 앞 의자에 앉아 있는 나에게 아내가 여자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라는 소리였다. 밤이 깊어서 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여자 화장실이라 다시 머뭇거리자 재차 아내가 들어오라고 한다. 화장실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으로 세면대가 있는데 아내는 그쪽으로 가더니 가까이 다가오라고 한다. 그리고 뭔가를 작심한 듯 입고 있는 병원복의 상의를 걷어 올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아내가 무엇 때문에 그곳으로 나를 오라고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어서 새삼스레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십여 년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익을 대로 익은 얼굴이라 새삼스레 다른 것도 없는데 한 여자가, 한 여자가 퉁퉁 부은 얼굴로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결혼하고는 떨어져 본 적이 없어서 그리움 맘 글로 달래 본 적도 없지만, 옆에 없어도 눈에 보이지 않아도 생각만 하면 떠오르는 얼굴인데 그 얼굴이 지금 내 앞에 서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한다. 펑퍼짐한 병원복에 가려져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얼굴 뿐 아니라 몸도 마음도 다 부어 있으리라.

 

  나는 어릴 때 내가 살았던 광산촌 산꼭대기 삼방동이라는 동네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동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좀 살다 보니 서울의 산동네는 내 유년의 시절이 묻어 있는 삼방동의 산동네보다도 더 높은 동네도 많았다. 어느 늦은 반 만리동 산 동네에서 바라다본 서울 야경은 거대한 괴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를 믿고 고향을 떠난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 서울 와 동가식서가숙하면서 떠돌아다닐 때 만났던 한 여자, 연고도 없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특별한 목적도 없이 배회하는 나에게 그 여자는 생소한 도시 생활 적응해 가는데 필요한 용기와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고독과 외로움을 잊게 하였고 결혼 후에는 삶의 위안과 안정을 주지 않았던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옆쪽으로 간호사실이 있고 그 간호사실을 중심으로 하여 사각으로 빙 둘러 가면서 복도를 따라 십여 개의 병실이 있다. 밤은 새벽 한 시를 향해 가고 있었고 복도에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환자도 보호자도 모두 잠이 든 병실은 적막하기만 하다. 신생아실이나 중환자실은 면회 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산부인과 병실은 면회 시간을 규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편리한 아무 시간에나 면회를 다녔는데 가족이라고 해도 자정이 넘은 시간에 면회를 오는 사람은 아마 우리밖에 없으리라. 면회라는 말보다 그 두 달여 동안 우리에게는 하나의 생활이라는 말이 더 적절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애들은 피자를 먹느라고 정신이 없고......

 

  그동안 매일 부은 얼굴을 봐서 그런지 다른 생각도 없이 아내의 퉁퉁 부은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내는 아무런 말도 없이 옷을 걷어 올리더니 배를 보여 주었다. 나의 눈은 아내의 퉁퉁 부운 얼굴에서 천천히 배로 향했고 그 순간 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숨도 제대로 쉬지를 못했다. 아내의 배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사람의 배가 어떻게 저렇게 늘어날 수 있는지,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내의 배는 마치 터지기 직전의 고무풍선처럼 늘어날 대로 늘어나 있었다. 고무풍선에다 바람을 계속 불어넣으면 부는 사람도 옆에 있는 사람도 언제 터질지 몰라 긴장이 되는데 아내의 배를 본 순간 너무 긴장되어 숨도 쉴 수 없었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저러다가 배가 터지는 것은 아닐까 무서워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어떻게 저런 배를 가지고 숨을 쉴 수가 있는지 정말 옆에서 보기에도 너무 힘이 들고 거북해 보였다.

 

  애를 낳기 전에 한번 보여 주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지 아니면 순간적으로 고통이 심해서 하소연하려고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아내의 배를 보고 있으려니 나는 나도 모르게 눈앞이 흐려져 왔다. 아내가 볼까 봐 고개를 돌렸지만 세면대 거울로 비춰진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배를 가지고 지금까지 견뎌 왔을까. 가슴이 아려 오면서 아내의 미련함에 화가 나기도 했고 그 모진 인내에 경탄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내의 건강과 아기에 대한 걱정 등 복합적인 감정이 솟구쳐 올라 화가 나기도 했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어떤 위로도 못 하고 나 스스로 화가 나 분통만 터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의사의 권고를 지키고 있었다. 아직 분만 예정일은 한 달이나 남아 있었고 초음파 촬영을 해봐도 아기의 킬로 수가 2.5킬로가 안 되기 때문에 조산을 하게 되면 미숙아로 태어나고 미숙아는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인하여 발육에 장애가 있을 수 있고 건강상의 문제도 있으니 배 속에서 키울 수 있으면 최대한 키워서 출산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엄마의 뱃속에서의 하루가 이 세상의 한 달보다 낫다고 하면서 아기를 위해서 참을 수 있으면 참으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내는 의사가 수술할 시기가 됐다고 할 때까지 건강한 아기를 낳을 수 있도록 모진 고통을 참아 가면서 참고 또 참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아내가 조그만 병에다 오줌을 담아서 주더니 간호사에게 전해 주라고 하였다. 아내는 정기적으로 소변검사를 하고 있었다.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새끼손가락만 한 병에는 아내 이름이 쓰여 있었는데 그 안을 한번 들여다보라고 하였다. 오줌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색깔은 희뿌옇고 무슨 하얀 벌레 같은 것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임신 중독증은 산모가 아무리 영양분을 섭취하여도 단백질이 소변으로 다 빠져나간다더니, 아마 벌레처럼 보이는 저 작은 알갱이들이 소변으로 배출되는 단백질인가 보다 생각을 했지 복수가 차서 배가 저렇게까지 불러있어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을 못 하고 있었다.

 

  임신 중독증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복수가 많이 찬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었다. 하지만 나도 나 나름대로 할 일이 있었고 몸과 마음이 피곤해져 있었기에 아내의 말을 귀 담아 듣지 않고 마이동풍 식으로 흘러 버렸었다. 복수 때문에 배가 아래로 쳐져서 걷는 것이 힘들다고 할 때도 예사로 들었고 걸으면 뱃속에서 물이 출렁출렁한다고 했을 때도 대수롭지 않게 듣고 그냥 흘러들었다. 둘째를 낳을 때는 처음 해 보는 수술이라 엉겁결에 해서 잘 몰랐는데 막상 또 수술하려고 생각하니 무섭고 두렵다고 했을 때도 나는 아내의 육체적 고통과 심적 불안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