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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길목에서 7―입원 2

흰구름과 함께 2023. 2. 22. 12:51

생활의 길목에서 7

 

―입원 2

 

 

  아내가 입원한 지 얼마 지났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매일 날짜를 세어 보는 것도 아니고 아마 한 달은 되었을 것 같다. 자는 애들을 깨우고 대충 옷을 입혀서 아내가 입원하여 있는 한일병원으로 향했다. 승용차로는 가다가 신호등 한두 번 받아도 집에서 채 십 분이 안 걸리는 거리이지만 8살 6살 먹은 애들을 데리고 걸어가기에는 좀 먼 거리였다. 일 마무리하고 어쩌다 보니 시간은 이미 밤 11시를 넘어서고 있었고 바깥은 영하의 찬바람이 세상의 사물을 움츠리게 하고 있었다.

 

  아내가 입원한 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한 번씩 때로는 볼일이 있어 두 번씩 갈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날짜도 무감각해져 버렸고 그냥 반복되는 일상이 되어 버렸다. 애들이 추울까 봐 미리 틀어 놓은 히터는 차 안을 따뜻하게 해 주었지만 나는 아무런 느낌도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전기만 넣으면 돌아가는 기계처럼 일하고 틈을 봐가며 병원으로 왕래를 하고 있다. 육신이 힘겨워지는 것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온종일 애타게 애들 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생각하면 안 갈 수도 없었다. 애들은 잠들어 엄마한테 가자고 조르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데도 나는 어떤 의무감에서 가봐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차창 밖으로 잠깐씩 스쳐 지나가는 거리에는 메말라 비틀어진 낙엽이 겨울 밤바람에 제 몸을 맡기고 힘없이 나부끼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 비치는 가로수 가지는 피골이 상접하고 가지에 매달릴 힘도 없어서 못내 떨어진 플라타너스 잎 큰 나뭇잎들은 휑하니 불어오는 칼바람에 휩쓸려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친다. 따스한 이부자리에 누워 낮에 쌓인 피로를 풀면서 이 얘기 저 얘기 사는 이야기 하며 아내와 같이 누워있다면 이 순간 더 어떤 행복을 바랄까.

 

  한때는 행복이라는 추상적 명사가 내 곁에는 없는 것 같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어느 날 새 생명이 처음 잉태되어 우리에게 왔을 때 그 황홀함과 신비함에 놀라워하며 그 주신 생명을 애지중지하면서 안으면 물방울처럼 터질까 알뜰살뜰 보살피지 않았던가. 그리고 지금 또 그 알 수 없는 새 생명의 신비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데 크나큰 축복을 알지 못하고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냥 그저 나는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다.

 

  어제도 갔다 왔고 오늘도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아내가 있는 병원을 향해 차를 몰고 있었다. 나는 아내가 보고 싶은지 아니면 아내가 나를 보고 싶어 하는지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병원으로 가면서 나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내를 위해서 가야 한다는 생각하고 있었다. 종일 덩그러니 않아서 애들 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생각하면 안 가볼 수도 없었다. 한정된 공간 속에서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니까 얼마나 답답하고 무료하겠는가. 애들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안타까운 마음에 병원으로 가고 있지만 내 몸은 지쳐 있었다. 육신은 피곤하기만 한데 그런데도 귀찮거나 안 가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루 한 번은 가봐야 하고 애들에게도 엄마 얼굴을 보여줘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 때문에 마음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깐의 생각에 차는 이미 우이천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북한산 골짜기를 타고 우이동을 거쳐 중랑천으로 들어갔다가 한강으로 흘러가는 우이천에는 병원으로 가는 다리가 놓여 있고, 그 콘크리트 다리는 병원에 다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지금은 일방통행이 되어 있지만 전에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고 조금 직진하다가 좌회전을 하면은 바로 병원으로 들어가는 오르막이 나온다. 오르막을 50미터 정도 오르면 나무가 심어있는 광장 중앙을 빙 돌아서 다시 출구로 나오게 되어 있는데 왼쪽은 정문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리면 응급실이다. 나는 우측으로 차 머리를 돌렸다. 아내가 입원하고 있는 산부인과 병동은 응급실 3층이었다.

 

안 아플 때는 몰라도 식구 중에 누구라도 아파서 병원에 가보면 왜 그리 아픈 사람들이 많은지..... 특히 종합병원에는 환자 한 명에 보호자가 여럿이 오다 보니 항상 북적이고 있었다. 인생 생로병사 중에 누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태어날 때의 뿐이고 서러운 것은 늙어 가는 것이요 괴로운 것은 아플 때라고 하였는데 살아서 병원 신세 안 지고 편안히 이 세상 하직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어느 인생이 선택권이 있어 생사를 내 맘대로 한단 말인가. 생이 내 맘대로 이 세상에 오지 않았듯이 사(死) 또 한 내 맘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에 인생이 슬프지 아니한가. 한날한시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죽을 때는 같이 죽는다면 더 없는 천생연분일 텐데.

 

  호구지책(糊口之策)이 장사다 보니 일요일이 아니면 낮에 애들 데리고 병원에 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밤늦은 시간에 애들을 데리고 병원을 갈 수밖에 없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융통성도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는지. 애들이 엄마를 보고 싶어 하면 가게를 누구에게 맡기고 잠깐 낮에 갔다 와도 되고 아니면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애들을 병원에 좀 데리고 갔다 오라고 하면 될 터인데 무엇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때는 굳이 내가 애들을 엄마에게 얼굴을 보여줘야 한다는 집착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주위에서 베풀어주는 호의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었는데 그 때는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록 방학 때이기는 하였으나 밤늦은 줄도 모르고, 자고 있는 애들한테는 미안한 감도 느끼지 못하면서 엄마한테 간다는 대의명분?으로 무조건 깨웠으니 나의 아집이 얼마나 애들을 귀찮게 하였을까 생각하니 참 미안하기도 하고 바보 같기도 하다.

 

  그날이 언제였던가. 내가 아내 때문에 처음 눈물 흘러본 날은. 날짜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날도 나는 애들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은 채 자는 애들을 깨워서 병원으로 향했다. 다른 날과 다른 것이 있다면 병원에 올 때 피자를 한 판 사 오라는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피자를 사오라는 아내의 전화에 좀 의아하기는 하였지만 나는 아내가 먹든 안 먹든 치킨을 사오라면 치킨을 사가고 피자를 사오라면 피자를 사 갔다. 그리고 뭐 사소하게 필요한 휴지서부터 속옷까지 사오라는 건 다 사 준 것 같은데 나중에야 알았지만 아내도 내가 힘들고 피곤한 걸 알기에 정작 필요한 것이 있어도 그때마다 다 시키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