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길목에서 11
―입원 6
그 때에 나는 아내를 병원에 입원시킨 것만으로 내 의무를 다한 것처럼 아내를 잊고 있었다. 아니 잊고 있었다기보다 생각 못하고 있었다. 병원을 믿고 있었고 입원만 하면은 병원에서 다 알아서 해 주는 걸로 알고 있었다. 아내는 보호자가 꼭 필요한 환자도 아니었다. 스스로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갈 수 있으며 답답하면 병원 복도를 산책?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는 아내를 환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묘한 이율배반적인 사고가 있었기 때문에 환자인 아내를 환자로 보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내의 몸 상태가 정상적이었고 단순히 아기를 낳으려고 병원에 입원했더라면 나는 아내를 환자로 보았을까. 의사의 입장에서 보면 일단 병원에 들어오면은 다 환자이지만 나는 산모인 아내를 환자로 생각하지 않고 출산을 위한 기쁜 마음으로 병원에 도움을 받으려고 잠시 가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애들 데리고 일하면서 나 혼자만 힘들고 고생하는 줄 알았지 아내는 병원에서 때 되면 주는 밥 먹고 편안히 잘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병원에는 TV도 있었다. 돈 백 원을 넣어야 30분 동안 나오기는 하지만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가 돌아가면서 돈을 넣었고 연속극을 그다지 즐겨 보지 않는 아내이지만 그래도 심심치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수술 날짜도 잡혀 있지 않아서 무료하면 TV라도 보라고 백 원짜리 동정도 넉넉히 바꿔다 주었다. 그냥 세월만 가면 배 속에 태아는 어느 정도 클 것이고 그러면 수술하면 되는 줄 알고 있었지 별다른 생각은 못 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아내는 속이 불편해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있었으며 날이 갈수록 부어오는 배 때문에 몸도 가누기 힘들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병원이 그저 평안한 줄로만 알고 있었으니.....
병원에 가보면 아내는 항상 주사바늘을 달고 있었다. 링겔주사를 24시간 맞고 있어서 주사 맞는 것도 이골이 났을텐데 그래도 주사바늘을 볼 때마다 겁이 난다며 힘없이 웃던 아내는 양 손등의 혈관부위가 다 짓물러 있었다. 팔 접히는 부분에 혈관이 잘 안 보여서 손등에다가 놓는데 그 것도 계속 맞다가 보니까 숙달된 간호사도 혈관을 잘 찾지 못하여 몇 번씩 새로 꽂을 때면 정말 고통스러운데 간호사가 미안해 할 까봐 아픈 척도 못했다는 아내. 그 아내는 나 같지 않아서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싫어하는 말을 잘 할 줄도 모르고 남이 들으면 기분 나빠하는 말은 하지도 않는다. 토론을 하다가도 상대방이 열을 받거나 우기면은 맞고 틀리고는 나중의 일이고 슬그머니 못이기는 척 해버리는 아내는 상대방의 배려가 너무 심해 가끔 나하고도 언쟁을 벌인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슬그머니 저 주기도 하고 급격히 열올리는 일은 별로 없지만 성격상 옳고 그름을 좀 따지다 보니 지금도 나는 가끔씩 아내의 눈총을 받는다.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지 말라고 입으로 눈으로 소음의 총을 쏘는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내는 자기의 힘든 병원생활보다 애들과 하루하루 생활하며 일상을 씨름하는 나에게 미안하여 최소한의 것만 시키고 있었다. 주치의는 임신중독증 환자는 잘 먹어야 한다고 하면서 병원에서 나오는 밥보다 사식으로 영양보충을 하라고 여러 번 권했으나 아내는 차마 나에게 그런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식으로는 전복 죽이 임신중독증 환자에게 좋다고 하였다. 예정일은 하루하루 다가오는데 태아는 수술할 정도로 크지를 않고 그렇다고 모든 걸 알부민 주사에만 의존할 수 없으니까 고단백질의 음식을 먹어서 태아를 빨리 키우라는 소리였는데 아내는 내가 애들을 데리고 힘들게 생활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세월이 십여 년이 흐르다 보니 지금은 많이 희석되어 있지만 그 때 화장실에서 아내의 터질 듯한 배를 보고 난 후에 나는 스스로 다짐을 했었다. 살아가면서 출산의 고통의 눈물말고 다른 일로 인해서 아내의 눈에 눈물을 흐르게 하지 않으리라고......그리고 지금까지도 지키려고 애쓰며 살아가고 있는데 사람의 마음이 한결같을 수가 없어서 남들 사는 것처럼 조그만 일에도 말다툼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정말로 아내에 대한 죄책감으로 사로 잡혀 있었다. 아이는 혼자 낳는 것이 아닌데 아무리 옆에서 잘해 준다고 해도 여자가 돼 보지 않고서는, 애를 낳아 보지 않고서는, 어찌 여자가 애 낳는 고통의 심정을 알 수 있을까......
지금은 우리 집 근처에 죽집이 생겨서 다양한 이름의 야채 죽도 팔고 전복죽도 만원에 팔고 있는데 그 때 그런 집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그 때는 그런 것을 파는 집이 없었다. 아내의 그 말을 듣고 전복죽을 어떻게 끊이는 지도 모르면서 전복을 사러 다녀 보았으나 큰 시장에 가지 않고는 전복을 구할 수도 없었다. 강원도 산골짝에서 태여 나서 전복이라는 것도 교과서에서나 보았지 그 때까지 먹어 보지도 못했었다. 생선 이름도 서민들이 주로 먹는 고등어나 양미리, 꽁치나 멸치, 갈치 같은 생선만 듣고 먹어 보았지 전복은 있어도 끓일 줄도 몰랐다. 아내도 나와 똑 같았다. 어떻게 끊이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아내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죽을 끊이든 만들든 일단은 전복이 있어야 되는데 집 가까운 재래 시장에서는 전복을 구할 수도 없었다. 큰 수산시장으로 가야 싱싱한 것을 구할 수 있는데 그 것도 생각처럼 쉽지를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대안으로 다시마를 다려서 다시마 물을 만들고 거기다가 꼬리로 국물을 우려낸 다음 찹쌀을 넣어서 죽을 만들었다. 다시마 도 붓는 몸을 다스리는데는 좋다고 하였다. 영양학자들은 별 영양분이 없다고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보신하면 떠오르는 쇠꼬리를 사다가 몇 번을 다리고 우러낸 물에다가 다시마 끓인 물을 부어서 찹쌀 죽을 쑤었는데 간이 맞는지 안 맞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리고는 보온병에 담아서 아내에게 갔다 주었다.
그러나 아내는 그 죽을 몇 일밖에 먹지를 못했다. 바로 수술 날짜가 잡혔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주치의에게 고통을 호소했고 아내의 배를 본 의사는 깜짝 놀라면서 왜 여태껏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오히려 아내를 책망했다고 한다. 다시 검사를 해 보고 태아가 2.5키로 정도 되면 수술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그 키로도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산모의 몸 상태도 별로 좋지를 않아서 날짜를 일주일 뒤에 잡았는데 의사가 다시 생각해봐도 더 미뤄서는 안되겠다고 생각을 하였는지 일정을 재조정하여 이틀 후로 다시 잡았다. 수술 날짜가 잡히고 나는 아내의 지시대로 태여 날 아기에게 필요한 배냇저고리와 내복 등 신생아에 필요한 물품을 챙기면서 그 와중에도 빼놓지 않고 챙기는 물건이 있었으니 그 것은 바로 비디오 카메라(캠코더)였다. 아내는 퉁퉁 부은 몸으로 아파서 괴로워하고 있는데 그런데 나는 지금 무얼 찍겠다고 캠코더를 챙기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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