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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시 모음-신경림/천상병 /김사인/김주대/안상학/황인숙/강해림 ...외

흰구름과 함께 2023. 6. 26. 10:07

장마 시 모

장마 시 모음-신경림/천상병 /김사인/김주대/안상학/황인숙/강해림 ...

 

장마

 

 

 

신경림

 

 

 


온 집안에 퀴퀴한 돼지 비린내
사무실패들이 이장집 사랑방에서
중돋을 잡아 날궂이를 벌인 덕에
우리들 한산 인부는 헛간에 죽치고
개평 돼지비계를 새우젓에 찍는다
끗발나던 금광시절 요릿집 애기 끝에
음담패설로 신바람이 나다가도
벌써 예니레째 비가 쏟아져
담배도 전표도 바닥난 주머니
작업복과 뼛속까지 스미는 곰팡내
술이 얼근히 오르면 가마니짝 위에서
국수내기 나이롱뻥을 치고는
비닐우산으로 머리를 가리고
텅 빈 공사장엘 올라가본다
물 구경 나온 아낙네들은 우릴 피해
녹슨 트랙터 뒤에 가 숨고
그 유월에 아들을 잃은 밥집 할머니가
넋을 잃고 앉아 비를 맞는 장마철
서형은 바람기 있는 여편내 걱정을 하고
박서방은 끝내 못 사준 딸년의
살이 비치는 그 양말 타령을 늘어놓는다

 

 

 

 

 

 

 

-시집『신경림 시전집』(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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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천상병

 

 

 

 

 

내 머리칼에 젖은 비
어깨에서 허리께로 줄달음치는 비
맥없이 늘어진 손바닥에도
억수로 비가 내리지 않느냐,⑴
비여
나를 사랑해 다오.
저녁이라 하긴 어둠 이슥한⑵
심야(深夜)라 하긴 무슨 빛 감도는
이 한밤의 골목 어귀를
온몸에 비를 맞으며 내가 가지 않느냐,
비여

 

나를 용서해 다오.

 

 

 

 

 


『천상병 전집』(평민사, 2007)

 


·61. 10. 『자유문학』에 발표.
·『주막 69』(민), 『천상 54』(오), 『저승 125』(일)에는 [비여 / 나를 사랑해다오. // 저녁이라 하긴 어둠 이슥한]으로 연갈이를 하여 2연으로 재수록.
『자유문학』에는
4행 ⑴ [않으냐,],
7행 ⑵ [익숙한]으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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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천상병

 

 

 


7월 장마 비오는 세상
다 함께 기 죽은 표정들
아예 새도 날지 않는다.

 


이런날 회상(回想)은 안성맞춤
옛친구 얼굴 아슴프레 하고
지금에사 그들 뭘 하고 있는가?

 


들에 핀 장미는 빨갛고
지붕밑 제비집은 새끼 세마리
치어다 보며 이것저것 아프게 느낀다.

 


빗발과 빗발새에 보얗게 아롱지는
젊디 젊은 날의 눈물이요 사랑
이 초로(初老)의 심사(心思) 안타까워라 ―
오늘 못다하면 내일이라고
그런 되풀이, 눈앞 60고개
어이할꺼나
이 초로의 불타는 회한(悔恨) ―

 

 

 

 

 

 

 

『천상병 전집』(평민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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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뒤

 

 

 

신경림

 

 

 

 

 

그해 여름에 우리는 삼거리 금방앗간
그 앞집으로 이사를 했다. 거기다가
물감과 간수를 파는 가게를 냈다.
삼촌이 객지에서 온 광부들과 얼려
매일장취로 술만 퍼먹고 다니던
그 지겹던 가뭄을 나는 잊지 못한다

 


아버지는 가게에 박혀 소주만 찾았지만
내게는 밤이 오는 것만은 즐거웠다.
길 건너 도장갈보네 집에서는
밤이 돼야만 노랫가락 소리가 들리고
나이 어린 갈보는 술꾼에게 졸리다가
우리 집으로 쫓겨와 숨어서 떨었다.

 


그해의 그 뜨겁던 열기를 나는 잊지
못한다. 세거리 개울가에 모여 수군대던
농군들을. 소나기가 오던 날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고
도장갈보네 집 마당은 피로 얼룩졌다

 


마침내 장마가 져도 나이 어린 갈보는
좀체 신명이 나지 않는 걸까
어느날 돌연히 읍내로 떠나버려
집 나간 삼촌까지도 영 돌아오지 않았다.
개울물이 불어 우리는 뒷산으로
피난을 가야했고 장마가 들면
우리는 그 피비린내를 잊지 못한 채
다시 장터로 이사를 한다는 소문이었다.

 

 

 

 

 


-시집『신경림 시전집』(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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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

 

 

 

천상병

 

 

 


어제는 비가 매우 퍼붓더니
오늘은 비가 안 오신다
올해 장마는 지각생이다.

 


테레비 뉴스를 보면
올 장마에
튼 수해를 입었다는데
나는 외국 소식인가 한다.

 


장마여 비여 적당히 내리라
그래야 올 농사가
잘 될 것이 아닌가!

 

 

 

 

 


-시집『천상병 전집』(평민사, 2007)
2011-06-28 / 화요일, 오전 11시 29분

 

 

 


·91. 가을. 『세계의 문학』에 발표.

 


2연 3행
'<튼> 수해를 입었다는데'
<큰> 인쇄 잘못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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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김사인

 

 

 

 

 

공작산 수타사로

 


물미나리나 보러 갈까

 


패랭이꽃 보러갈까

 


구죽죽 비는 오시는 날

 


수타사 요사채 아랫묵으로

 


젖은 발 말리러 갈까

 


들창 너머 먼 산이나 보러갈까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비 오시는 날

 


늘어진 물푸레 곁에서 함박꽃이나 한참 보다가

 


늙은 부처님께 절도 두어 자리 해바치고

 


심심하면

 


그래도 심심하면

 


없는 작은 며느리라도 불러 민화투나 칠까

 


수타사 공양주한테, 네기럴

 


누룽지나 한 덩어리 얻어먹으로 갈까

 


긴 긴 장마

 

 

 

 

 

 

 

-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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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김주대

 

 

 


아버지만 당신의 생애를 모를 뿐
우리는 아버지의 삼개월 길면 일 년을
모두 알고 있었다
누이는 설거지통에다가도 국그릇에다가도
눈물을 찔끔거렸고
눈물이 날려고 하면 어머니는
아이구 더바라 아이구 더바라 하며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어놓고 했다
아직은 아버지가 눈치 채지 못했으니
모두들 목구멍에다가 잔뜩 울음을 올려놓고도
내뱉지는 않았다
병원 출입이 잦아지면서 어느 때보다
무표정해진 아버지 얼굴에는
숨차게 걸어온 오십구 년 세월이
가족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전에 없이 친절한 가족들의 태도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 모를 일이다 아버지는 이미
당신의 남은 시간을 다 알고 있으면서
가족들을 위해
살아온 생애가 그렇듯 애써 태연한 건지도
여름내 아버지 머리맡에 쌓이는
수많은 불교서적들에서
내가 그걸 눈치 챌 무렵
어머니가 열어놓은 창 밖에는
긴 장마가 끝나가고 있었다
   

 

 

 


-시집『꽃이 너를 지운다』(천년의 시작,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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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안상학

 

 

 

 

 

세상 살기 힘든 날
비조차 사람 마음 긁는 날
강가에 나가
강물 위에 내리는 빗방울 보면
저렇게 살아 갈 수 없을까
저렇게 살다 갈 수 없을까
이 땅에 젖어들지 않고
젖어들어 음습한 삶내에 찌들지 않고
흔적도 없이 강물에 젖어
흘러 가버렸으면 좋지 않을까
저 강물 위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이 땅에 한 번 스미지도
뿌리 내리지도 않고
무심히 강물과 몸 섞으며
그저 흘러흘러 갔으면 좋지 않을까
비조차 마음 부러운 날
세상 살기 참 힘들다 생각한 날
강가에 나가 나는

 

 

 

 

 

 

 

-시집『오래된 엽서』천년의시작,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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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황인숙

 

 

 

 
빗방울보다 단단한 것들이
빗방울처럼 가볍게
맞받아치는 소리 들린다
또 하염없이 맞받아치는
냉장고 위 천장 구석
둘둘 말린 거미줄, 이라기보다 거미줄의 허물
열린 창으로 바람이 들이칠 때마다
풀썩, 풀썩 몸을 뒤챈다
이 방에서 거미를 본 바 없는데
저렇듯 거미의 자취가 종종 보인다
비 오는 날은 거미들이
공치는 날일 것이다
파리, 나방이, 잠자리, 하루살이
그 많은 날벌레도 그럴 것이듯

 


하필이면 급경사길이 많은 동네에서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를 종종 본다
비 오는 날 그분을 만나면
세상이 폐지처럼
거미줄처럼 눅눅해진다
할머니시여, 빗방울보다 단단하소서

 

 

 

 

 


-시집『리스본행 야간열차』(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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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강해림

 

 

 


  복지교회 옥상 위에서 예수가 비를 맞고 서 있다 첨탑 십자가를 향해 빗줄기가 심문하듯 창끝, 꽂힌다 시멘트 바닥 널브러진 검은 비닐봉지와 널빤지 조각들 퉁퉁 불은 기억의 한쪽 끝을 움켜쥔 채 빗물 토해내고 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멀어, 꿈과 현실을 사선으로 이어주던 양철계단이 삐걱거리며 무거워진다 빗소리에 지붕과 지붕, 번지와 번지 사이 구원이라 믿었던 길들 경계가 실려가고 삶의 찌꺼기가 홈통을 타고 흘러내린다
  세상을 온통 붉은 녹물로 뒤섞어놓으며 범람하는 시간의 하수도는 만원이다 밤새 중얼거리던 주기도문이 떠내려가고 누추와 생활의 무게로 달그락거리던 세간살이가 떠내려간다

 


  며칠째, 옥상 안테나는 복음 대신 빗소리를 송전하고 있다

 

 

 

 

 


―시집『구름사원』(한국문연,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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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정진경
 

 

 

 

링거액이 몸 안에 집을 지어

 

공중누각들을 무너뜨린다

 

 
비밀스런 공사장에서 맞은 망치의 상흔

 

두꺼운 딱지로 아물었다 생각했는데

 

몸은 그것을 낙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병원 진단서에 기재된

 

‘충수염 진공된’

 

그 망치는 여전히 내 뒤통수를 때려

 

오장육부 내장 깊숙한 곳에 구멍을 파 놓았다

 

 
정처 없이 길 헤매던 보헤미안의 시간

 

설빙에서 추락하는 헛꿈에 시달린 것은

 

그 망치질이 원인이다
 

 

사나흘 쏟아져 들어오는 링거액이

 

메마른 나를 통통하게 살 오르게 한다

 

촉촉한 물풀이 자라자 내 몸은 자꾸

 

점프,

 

점프를 하고 싶어 한다

 

‘고통 없는 세상 저 너머로’

 

궁핍한 이들의 희망적 메시지가 발돋움 한다

 

이것은 또한 핍박을 제공하는 근원처

 

세상은 아랫것들이 점프하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점프하려 하면 야무지게 꾹꾹 눌러

 

망치질을 한다
 

 

금속성 메스로 몸을 가르고

 

링거액을 혈관에 들이붓는 며칠 동안

 

가뭄은 잠시 해소된다

 

 
세상에 파종하지 못한 말(言) 대신 몸이 점프, 점프를 한다

 

 
가열하던 태양이 잠시 나를 비켜간다

 

 

 

 

 

 

 

―계간『작가와 사회』(201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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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이명윤

 

 

 


  라라라,
 

 

   그가 봉지를 찢고 딱딱한 라면을 꺼내 들어요 그는 라면을 희망적으로
읽지요 창문 너머 훔쳐보는 고양이의 눈빛 따윈 신경 쓰지 않기로 해요

 

 
   라면, 라면, 라면,

 

 
   라면은 잠시나마 그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가요 그가 부자라면 그가 실
업자가 아니라면 그가, 그가 아니라면 곧 냄비 속에서 친친 감긴 긴장을 풀
고 길이 되어 춤 출 것이죠 와글와글 끓어오를 것이에요

 

 
  창 밖, 장맛비가 쫙쫙 펴진 면발처럼 내려요 라면이 끓자 전화벨이 시끄
럽네요 그는 허겁지겁 라면을 먹기 시작해요 지독한 고양이, 그는 달라붙는
고양이를 걷어차 버려요 만복여인숙 303호실 창문 너머 휴대폰을 든 고양이
가 떨어지네요 하나 남은 마지막 라면을 먹어치우며 그는 연신 중얼거리죠
  빌어먹을 고양이,

 

 
   똑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려요 붕대를 감은 고양이가 손바닥을 펴며 웃는
데요 이봐, 벌써 석 달이나 밀렸어,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봅니다 여전
히 장맛비가 쭈르르 쭈르르 내리는데요 얼마 못 가 거리는 퉁퉁 불어터질
것인데요,

 

 

 

 

 

 

 

―시집『수화기 속의 여자』(삶이보이는창,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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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이동훈
 

 


프로테스탄트의 혁명이 시퍼렇게 싹을 틔울 때였지
갓 생리를 시작할 무렵의 13세 어린 소녀
횃불을 들고 탄광의 입구를 밝혔어
광부들이 갱도를 나오는 몇 십 분의 캄캄한 밤을 밝히기 위해서 말이야
빵 한 조각, 단지 배가 고파서 빵 한 조각을 위해서 말이지
오므린 연한 사타구니를  타고 내리는 선혈을 지켜보던 책임자는
짐승만도 못한 욕정에 소녀를 범하였지
지켜본 목격자들 모두 혀를 차면서도
생계를 위하여 잘릴까봐 못 본 척 하였던 게야
씨팔 친구의 딸이 겁탈을 당해도 말이지
탐욕의 제물로 받쳐진 사생아는 물의 혁명을 기억하지
고인 물을 엎지 못하면 위에서 물을 부어 제끼는 수밖에 없거든
죽음을 담보로 한 종교개혁자들이 필두로 나선거야
그리하여,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전된 앙금은 여전히 탁함을 자랑하지
썩어 빠진 농도의 차이뿐
튀어 오른 매연이 죽기 살기로 양복 바지춤에 앙금을 남기듯
시커멓게 속내를 감추고
가만가만 폐부를 압박하고 잠식하는 것처럼 말이지
그런데 목격자인 하늘이 가만 있겠어

 

지천으로 물을 퍼붓고 흘러내리게 하여
강간의 그날을 잊지 말라고 지천을 황토 빛으로 물들이는 것을.

 

 

 

 

 


―격월간『詩와 창작』(2005년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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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최세라

 

   

 

 
그날이 우르르 몰려온다

 

한쪽으로 쏠리며 질주하는 천장의 쥐떼들처럼

 

그날로부터 하루

 

그날로부터 일 주일

 

한 달, 일 년과 16일째 되거나

 

내가 죽은 지 2년 89일째 되는 어느 날
 

 

아니면 하루살이의 전생인 어제로부터 뒷걸음질 쳐
 

 

한 번 꺾인 필름처럼

 

영사기에 걸린 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지 않는,
 

 

나에게 보내는 메일함이 넘쳐

 

거센소리들 쏟아지고 튀어 오르던 그 날

 

물처럼 금 밖으로 물러나 쏟아지는 불빛 속을 대책 없이 걷다 보면

 

후렴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너는 스치는 역이야 그냥 지나치는 역이야

 

잠깐 내려 어묵을 먹다가 구둣발로 플랫폼을 문질러 보는

 

숱한 날들 가운데 하루야
 

 

빗물에 무너지는 절개지처럼 그날이 젖어서 쏟아져 내리고

 

먼 빗줄기에 걸터앉아 오늘이 느린 템포로 시작되었다

 

 

 

 

 

 

 

―계간『시와 반시』(201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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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최호빈

 

 

 

 

 

꿈을 세척하려고 잠든 눈에 새벽을 넣는다
서로에게 방자한 빛과 어둠을 뛰어 내려가다 층계에서 실수한다

 


지상과 결별한 나의 체념과
지상을 향한 나의 화해는
입에서 새어나오는 졸음에 불만이었다

 


구석이라 불러도 좋을 표피에
순결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잎들이
꾹꾹 눌러쓴 여름

 


누군가로부터 익명을 즐기는 동안
그의 심장이 멈추면 안 되므로
독충들이 마비를 방지하는 침을 심는다
칭찬에 속느라
아이들이 찔린 눈을 느끼지 않는다

 


보잘 것 없는 한 줄을 되감는 요요처럼
뒤쪽의 외출이 개척되었다는 것을
내일쯤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름은 몰랐다
좌우가 감미롭다는 것을 알게 된 그네가
삐뚤거리기 시작했고
치렁한 장식구를 걸친 바람이
부서진 담벼락을 더듬고 있었다

 

 

 

 

 


―계간『다층』(201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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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김민서

 

 

 

  

 

비 온다

 

끊어진 듯 이어지고

 

잦아들다 격해지며

 


비 온다

 

오로지 한 길로

 

오롯이 한 마음으로

 

 
말갛게 질겨지는 이 빗줄기

 

낱낱이 바늘귀에 꿰어

 

터진 마음의 솔기를 기우면

 

수몰은 면할 수 있을까

 


비 온다

 

어느새 정강이를 적시고

 

허리 명치 지나

 

기어이 쇄골까지 차올라 흥건한

 

그리움의 벅찬 물살

 


그리움은

 

철없이 장마 지고

 

한없이 범람하는

 

내 안에 있는 외부

 

이번 生은

 

도무지 수심을 헤아릴 길 없는

 

내 안으로

 

그대의 속으로

 

깊이깊이 수장되리라

 

 

 

 

 

 

 

―웹진『시인광장』(2012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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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전선

 


  서영처

 

 

 


  지금은 깊은 잠을 훔친 구름걸레를 두들겨 빠는 시간 결백을 증명할 때까지 구정물을 헹구는 시간 빛이 반짝거리고 밥알과 국건더기 묻은 슬픔이 들썩거리는 지금은 갓 솎은 상추에 졸인 고등어를 볼이 터지게 싸먹다 말고먹구름을 따라나서는 시간 영문도 모르는 채 밀려 온 구름들 묵직한 자루를지고 북상하는 전선을 따라 산맥을 넘는 시간 숨이 컥컥 막히는 오르막 쫓고 쫓기는 발굽 아래 검붉은 먹을 토해내며 새끼를 분만하는 시간 태반을 찢으며 나온 구름들이 태초의 음악을 울어대는 동안 불그레한 진액이 흘러넘치는 강엔 주검이 떠내려가고 지붕에 얹힌 어미돼지와 새끼가 떠내려가고, 쿠데타 쿠데타의 어슴푸레한 저녁, 수수밭 건너와 낮술 한 잔씩 걸친 수수방관의 구름들, 종일 내달린 혈기방자한 구름들도 전깃줄에 다리를 척척걸치고 가랑이의 물기를 짜내며 시퍼래진 입술로 담배를 한 개비씩 나눠 피며,

 

 

 

 

 

 

 

―계간『서정시학』(201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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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끝물

 

 

 

장석남

 

 

 


산 넘어 온 비가
산 넘어 간다
비단옷으로 와서
무명옷으로 간다

 

 

 

들 건너 온 비가
들 건너 간다
하품으로 와서
진저리로 간다

 

 

 

물 건너 온 비가
물결 건너 간다
뛰어온 비가
배를 깔고 간다

 

 

 

아주 아주 오랜만에 국밥집에 마주앉은
가난한 연인의 뚝배기가 식듯이
이슬비가 되어서
비가 간다

 


 

 

 

 

―계간『한국문연』(2007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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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에

 


공광규

 

 

 


건물과 숲을 배경으로 나를

 

사진 찍으려고 검은 구름 커튼을 친 채

 

후렛쉬를 마구 터트리신다

 


내가 지상에서 저지른 죄를

 

조목조목 다 아는지

 

후렛쉬를 터트린 후 호통까지 치신다

 


배경이 맘에 들지 않는지

 

아니면 내가 너무 더러운지 비를 뿌려

 

샤워도 시켜주신다

 


구름 위 저 하늘로 가는 날

 

오늘 찍은 사진을 편집해 두었다가

 

판단하시려는가 보다.

 

 

 

 

 


―웹진『시인광장』(200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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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장마

 


정끝별

 

 

 


새파란 마음에

 

구멍이 뚫린다는 거

 

잠기고 뒤집힌다는 거

 

눈물 바다가 된다는 거

 

둥둥

 

뿌리 뽑힌다는 거

 

사태지고 두절된다는 거

 

물벼락 고기들이 창궐한다는 거

 

어린 낙과들이

 

바닥을 친다는 거

 


때로 사랑에 가까워진다는 거

 


울면, 쏟아질까?

 

 

 

 

 


―계간『내일을 여는 작가』(2001년 가을호)
-시집『삼천갑자 복사빛』(민음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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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의 나날

 

 
허 연

 

 

 

 
강물은 무심하게 이 지지부진한 보호구역을

 

지나쳐 갑니다. 강물에게 묻습니다.

 


“사랑했던 거 맞죠?”

 

“네”

 

“그런데 사랑이 식었죠?”

 

“네”

 


   상소 한 통 써 놓고 목을 내민 유생들이나, 신념 때문에 기꺼이 화형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장마의 미덕이 있습니다. 사연은 경전만큼이나 많지만 구구하게 말하지 않는 미덕, 지나간 일을 품평하지 않는 미덕, 흘러간 일을 그리워하지도 저주하지도 않는 미덕. 핑계대지 않는 미덕. 오늘 이 강물은 많은 것을 섞고, 많은 것을 안고 가지만, 아무것도 토해 내지 않았습니다. 쓸어안고 그저 평소보다 황급히, 쇠락한 영역 한가운데를 몰핀처럼 지나왔을 뿐입니다. 뭔가 쓸려 가서 더는 볼 일이 없다는 건, 결과적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치료 같은 거죠.

 

 
   강물에게 기록 같은 건 없습니다

 

   사랑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계간『시작』(2012년 가을호)
(제5회 시작(詩作) 작품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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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장마는 길었다

 


송경동

 

 

 

 

 

그들의 싸움은 장마처럼 길었다
와? 와아? 와아? 하며
뱃일을 다니는 사내가
밑도 끝도 없이
세간살이 하나하나를 깨나갈 때마다
부둣가 다방엘 다니는 동거녀는
썰물에 씻기는 모래알처럼 쓰러지며
와아? 와아? 와 그라는데 하며 흐느꼈다

 


나는 그들의 옆방
월세 10만원짜리 생활 속에
텅빈 소라껍질마냥 기구하게 누워
불도 켜지 못한 채 서러웠다
모든 건, 이 지긋지긋한 장마비 때문이라고
위안해 보지만
떨쳐지지 않는 기억들

 


아버지는 내게
끈질긴 미움과
풀어지지 않는 말들의 매듭과
쟁그랑 깨어지는 가슴을 물려주었다
폭풍우에 휩쓸려 온 해초들마냥
파도처럼 우악스러운 손아귀 속에서 쥐어뜯기던 어머니
퍼런 멍으로 보이던 달
새벽이면 어시장 주변을 배회하던 개들
몇 도막난 생선처럼
도매금으로 뭉툭뭉툭 잘려 나가던 젊음

 


왜? 왜?
왜 그랬는데?
물어도 물어도 서로 대답없는 뭍처럼 파도처럼
끊이지 않는
이 싸움은 언제나 끝나련가

 


먼동이 터오는 새벽
밤샘 폭풍우 잦아들고
이제 그만 와와? 와와? 쉬고 쇤 목소리들도 잔물결마냥 잦아들어
그때야 슬며시 나와 보니
깨진 그들의 한칸짜리 방 창문 너머로
기울어진 두 사람 마주앉아 있다

 


어이가 없었으니 다행이라고 하랴
저기 멀리 다시 하루의 해가 떠오르고
시원한 새벽바람이 부니
다행이라고 하랴

 

 

 

 

 

 

 

―계간『신생』(2007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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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장마

 

 
이병률

 

 

 

 

 

미안하다고 구름을 올려다보지 않으리라

 

좋아, 라고 말하지도 않으리라

 

 

 

그대를 데려다주는 일

 

그대의 미래를 나누는 일

 

그 일에만 나를 사용하리라

 

 

 

한 사람이 와서 나는 어렵지만

 

두 평이라도 어디 땅을 사서

 

당신의 뿌리를 담가야겠지만

 

그것으로도 어려우리라
 
꽃집을 지나면서도 어떻게 살지?

 

좁은 골목에 앉아서도 어떻게 살지?

 

요 며칠 혼자 하는 말은 이 말뿐이지만

 

당신으로 살아가리라

 

 

 

힘주지 않으리라

 

무엇이 비 되어 내리는지도

 

무엇으로 저 햇빛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리라

 

 

 

하지만 세상에는

 

공기만으로도 살아가는

 

공기란(空氣蘭)이라는 존재가 있음을 알았으니

 

당신으로 살지는 않으리라
 
물 없이

 

흙도

 

햇빛도 없이

 

사람 없이

 

나는 참 공기만으로 살아가리라

 

 

 

 

 

 

 

―계간『시와 표현』(2012년 가을호)

 

 

   장마

 

   조숙향

 

 

   자꾸 부엌바닥에 물이 차오르는 꿈을 꾸어요. 밥풀 달라붙은 양푼 둥둥 떠다니고 뒤틀린 찬장이 물에 잠겨요. 아버지의 여자 붉은 입술 같은 연탄아궁이에 물이 가득 차올라요. 어느 물을 먼저 퍼내야 할지 바닥을 내려다보다 연탄아궁이를 들여다보다 연신 갈팡질팡. 연탄집게에 집힌 것은 술에 쩐 어머니에요. 깡마른 집주인은 방 빼라고 다그치고 방 안의 거머리들이 어머니 다리에 달라붙었다가 내 다리로 옮겨 붙어요. 아무리 뛰어도 떨어지지 않아요. 허우적거리는 식은땀이 질척거려요.

 

  ―시집도둑고양이 되기(시산맥,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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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성영희

 

 

비 내리는 강가

청둥오리 한 마리 머리를 쳐 박고 연신 자맥질 중이다.

뒤집힌 강물 속에서 무엇을 솎아낸 것일까

아름다운 지느러미와 꼬리를 삼키고

물갈퀴마다 꽃이 피는 지금은

산허리도 부푸는 장마철

물이, 물의 것들이 날아올라 풀숲에 든다.

물이 쏟아지는 철인데

날아가는 물이 대수롭냐고, 빗줄기에

울음의 곡을 붙인다.

 

저 장마의 바깥에는

염천炎天이 들어앉은 마음들이 또 몇이나

물속을 뒤지고 있을 것인가.

빗물로 와서 강물로 흘러가면 그뿐인

그러나 마음 한번 독하게 먹으면

세상도 발칵 뒤집고 마는

저 작은 빗방울들

 

슬픔이란 범람과 혼탁을 거쳐

가을 강물 속같이 투명에 이르는 일

쏟아지는 수 억 만개의 과녁을 다 받아내고

짧은 파장으로 범람하는 일

퉁퉁 부운 이름들만 물안개처럼 떠도는

비의 계절을

자맥질로 뒤지는 오리들,

 

 

 

―월『모덤 포엠』2019년 7월호)

음-신경림/천상병 /김사인/김주대/안상학/황인숙/강해림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