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락당(獨樂堂)
조정권
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는
벼랑꼭대기에 있지만
옛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숴버린 이.
(『산정묘지(山頂墓地)』. 민음사. 1991)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7』(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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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빙가(聽氷歌)
조정권
1
마당을 쓸고 있는 빗자루에게도 잠시 혼자 있을 시간을 준다 어
진 시간이여
2
놀랐다 대웅전 마룻바닥 천정까지 꽉 들어찬 만산홍엽 단풍빛
3
초겨울 햇빛 요즘 톡톡히 옷 노릇 하네
4
밤새도록 지붕위로 걸어 다니는 눈송이
소리 내지 않는 눈부처
5
간밤 내린 눈이
장작마다 흰 꽃을 수없이 피워놓았다
도끼날에도 흰 꽃을 달아놓았구나
6
겨울 산 한 채 먹으로 개고 또 개어 우둔한 마음으로 마주한다 맑
은 암향(暗香) 힘 뻣세고 뻣세다 붓에 힘 빼고 깊은 먹 속으로 한가
로운 늙은 붕어를 찾아본다 어리석다 내 얕은 붓질
7
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
8
세이각(洗耳閣) 문고리
소리 하나 없이 공하다
9
연못바닥 환하고 공하게 드러나니 두 번 겨울눈이 온다
10
내 화두는 추위 한 점 안 먹은 달
설월(雪月)의 처마 끝
11
절 아주머니들 물걸레질 마치고 돌아간
대청마루에 살얼음 낀 하늘 다시 살아온다
12
부엌에 하얗게 씻어다놓은 파뿌리
스님네들 겨울살이 창호지 구멍만큼 내 비친다
13
사는 거 문제없다는 게 문제
사는 거 큰일났다는 게 큰일
14
형광등 빛 같이 흐린 마음에 장닭처럼 홰치는 눈보라
15
큰 칼 든 사천왕 옆을 통과할 때마다 마음의 소지품 검사
16
꽃길을 지나온 바짓가랑이로 따라오는 흰 나비
17
풀밭에 누워 들었다 얼음장 안고 뒤로 흘러가는 봄강물 소리
18
배추벌레 애벌레 푸른 배때기 대고 기어가는 잔가지 하나같은
세상
세 번째 봄이로구나
19
버스길로 떨어진 까치알 느티나무 아래서 손 흔들며 버스 세운다
20
봄비야 네 집이 예서 가까우냐 오늘밤 곁에서 하루 묵으면 안 되
겠니
21
석천암 늦가뭄 산더덕 향 대청마루처럼 뻗어나가는 매미울음소
리
―계간『문학과 사회』(2010년 가을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1 올해의 좋은 시 100選』(아인북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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