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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시 모음 -이가림 / 조운 외

흰구름과 함께 2023. 6. 30. 20:02

石榴

 

 

 

이가림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 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 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 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 주소서

 

 

 

 

 

 

(『제5회 신인지용문학상』.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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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이가림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주소서

 

 

 

 

 

 

-시집『순간의 거울』(창작과비평,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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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조운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조운 시조집』.남풍. 1990)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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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정지용

 

 

 

 

 

장미꽃처럼 곱게 피어가는 화로의 숯불,
입춘 때 밤은 마른 풀 사르는 냄새가 난다.

 


한겨울 지난 석류 열매를 쪼개어
홍보석 같은 알을 한 알 두 알 맛보노니

 

투명한 옛 생각, 새론 시름의 무지개여
금붕어처럼 어린 녀릿녀릿한 느낌이여

 


이 열매는 지난해 시월 상달 우리 들의
조그마한 이야기에 비롯될 때 익은 것이니,

 


작은 아씨야 가녀린 동무야, 남몰래 깃들인
네 가슴에 졸음 조는 옥토끼 한 쌍.

 


옛, 못 속에 헤엄치는 흰 고기의 손가락, 손가락,
외롭게 가볍게 스스로 떠는 은실, 은실,

 


아아 석류 알을 알알이 비추어 보며
신라 천년의 푸른 하늘을 꿈꾸노니.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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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임영조

 

 

 

 

 

그 무슨 치욕으로
이 악물고 침묵하던 복서가
이 가을 문득
금빛 주먹 한 방을 날려
천하를 재패하는 순간이다
그 가슴 벅찬 환희에 들떠
비로소 터뜨리는 홍소(哄笑)다
보라,
저 찬란한 파열음 사이
아프게 배어드는 피멍을
오, 상처뿐인 영광을.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1(제3시집 갈대는 배후가 없다)』(천년의 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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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김명인

 

 

 

 

 

푸르스름한 둥근 공이 끝 분홍빛 촉수를 열고
꼬마 알전구 하나 내밀면서
석류도 뒤늦게 꽃燈 매달았다
여름내 초록 숲길 더듬고 가야 할
순 자연산 손전등
대궁이자 열매인 꽃의 전부
저 불 깜박이면 검은 잎백 사이에서 깨어나는
아가가 작은 주먹 가득 잼잼 움켜쥐겠지
우윳빛 볼 두덩에 살색 올리겠지
홍소 깨물고 가지런한 치열 벙글겠지
마침내 너도 한 잎
시린 사랑 덥석 베어 물어야지
내가 돌고 선 오늘이 보잘것없는 숫기임을
석류를 보면서 비로소 깨닫는다 잇몸이
시큰거리도록 군침이 도는
비릿한 첫사랑 생살아!

 

 

 

 

 

 

 

-시집『파문』(문학과지성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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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송상욱

 

 

 

 

 

발그라한 꽃숨 내쉰 나날

 

비밀스런 음핵 감싼 보석주머니

 

공중 어디에 숨겨놓았다

 

북두칠성 젖니 난 아이들 내려와

 

금빛 산란 이는 숨결 이는, 저것들이 사랑을 주고받을 씨받이일가

 

나비 등 너머 숨가쁘게 오는

 

햇살

 

머금은

 

화축(花軸) 깊이, 몰래 몰래 눈물 삼키며

 

입술 깨문

 

붉은 요정들의 금니빨 사이로

 

새금한 웃음, 감돈다

 

왼쪽 귀밑머리에

 

노란 꽃 리본을 달고, 깔밋한 울금빛 자낭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여인인 양?,

 

 
아 이럴 때, 살 속에

 

향그랗게 익은 씨알 한 알 한 알

 

깨물고 싶은,

 

 

 

아무도 모르는 정념에 젖는 가을의 색정(色情)?,

 

 

 

 

 


―월간『유심』(2013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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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안도현

 

 

마당가에 석류나무 한 그루를 심고 나서

나도 지구 위에다 나무 한 그루를 심었노라,

나는 좋아서 입을 다물 줄 몰랐지요

그때부터 내 몸은 근지럽기 시작했는데요,

나한테 보라는 듯이 석류나무도 제 몸을 마구 긁는 것이었어요

새 잎을 피워 올리면서도 참지 못하고 몸을 긁는 통에

결국 주홍빛 진물까지 흐르더군요

그래요, 석류꽃이 피어났던 거죠

나는 새털구름의 마룻장을 뜯어다가 여름내 마당에 평상을 깔고

눈알이 붉게 물들도록 실컷 꽃을 바라보았지요

나는 정말 좋아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가을이 찾아 왔어요

나한테 보라는 듯이 입을 딱, 벌리고 말이에요

가을도, 도대체 참을 수 없다는 거였어요

 

 

월간현대시학(2009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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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나희덕

 

 

석류 몇 알을 두고도 열 엄두를 못 내었다

 

뒤늦게 석류를 쪼갠다

도무지 열리지 않는 문처럼

앙다문 이빨로 꽉찬,

핏빛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네 마음과도 같은

석류를

 

그 굳은 껍질을 벗기며

나는 보이지 않는 너를 향해 중얼거린다

 

입을 열어봐

내 입 속의 말을 줄게

새의 혀처럼 보이지 않는 말을

그러니 입을 열어봐

조금은 쓰기도 하고 붉기도 한 너의 울음이

내 혀를 적시도록

뒤늦게, 그러나 너무 늦기는 않게

 

 

 

월간현대문학(2000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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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이수익

 

 

합궁合宮

뜨거운 열락悅樂

터뜨리는,

 

다물지 못할 입……

 

속으로 아프게 물고 있는

극기克己

푸른 치아들.

 

    

 

월간현대시학(1990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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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강기원

 

 

석류를 먹는다

이란산 석류

석류를 먹을 땐 귀를 열어야 해

히잡에 가려진 여인의

첩첩 비밀 같은

석류

석류는 노래한다

나는 석류를 노래한다

신랑을 모르는 新房 같은 네가

사막의 붉은 유방인 네가

검은 차도르 밑의

눈부신 알몸 열듯

스스로를 쪼갤 때

네게선 도살장 냄새가 나

코란의 칼에 베인

여인의 심장 냄새

알 가득 품은 채 배 갈라진

지중해의 아가미 냄새가 나

하여,

석류를 먹을 땐 가슴으로 먹어야 해

어느 새 내 뇌수 속에 가득 차는

네 붉은 알들

차가운 너를 뜨겁게 먹을 때

너는 내게 속삭이지

죽음의 키스를 하듯

이슬람 여인의

다 전하지 못한

검은 망토의

길고 질긴 슬픔

 

 

 

계간작가세계(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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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신동옥

 

 

가지 끝에 피톨을 머금고 삼켜 솟구치는 불의 나팔

 

밤하늘로부터 일직선으로 날아드는 대답에 귓바퀴를 안으로 돋는 옹골찬 타악기

 

떨어져 썩은 한 알이 가지에 기어올라 과육을 졸이고 졸여서 쪼그라들어서 샅을 긁고 습진을 털어내고 다시 잎을 틔울 때

 

끝간 데까지 저를 물리고도 모자라 검붉게 달아오른

 

핵, 탄착점 없는 열정이 꿈꾸는 희생자 없는 세계의 고요한 哀絶陽.

 

 

 

―계간『시로 여는 세상』(2013.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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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류

  임솔아


  창문은 창밖에 서 있는 나를 보게 한다. 내 허벅지 위로 도로가 나 있고 내 허리 속으로 막차가 도착한다. 사람들이 쏟아져 내리고 내 가슴 속 빌딩으로 걸어 들어간다. 가슴에 손을 넣어 창문을 연다. 한 여자가 화분을 분갈이하고 있다. 그 아래 창문을 열면 쪼개어진 석류가 식탁에 있다. 그 아래 창문을 열면 하얗다. 갓난아이가 눈을 움켜쥔 채 설원 위를 기어간다. 그 아래 창문을 열면 내 눈썹에서 가로등이 켜진다. 내 이마에서 비행기가 지나 간다. 몸속에 있던 도시가 몸 밖으로 배어 나온다. 마지막 창문을 열면 창 안에 서서 창문을 세어보는 나를 볼 수 있다. 알알이 유리가 빛나고 있다. 불을 끄면 창밖에 서 있는 나와 창 안에 서 있는 내가 함께 사라질 수 있다.



ㅡ시집『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문학과지성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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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문태준


윗옷 단추를 끄르듯
웃음이
웃음의 앞자락을 헤치며

석류는 툭 터졌네
넘어진 화병처럼

언제라도
비탄이 없는
악보

속 깊은 가을의
정교한 건축

붉은 잇몸의 빛
알알이
조용한 시간의 카펫 위에
흩어지네

 


ㅡ시집『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문학동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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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최금진

 

 

고작 내가 생각해낸 방안은 방범창을 단단히 잠그는 것

늙은 석류나무가 수류탄 같은 열매를 달고 있고

목을 맨 듯 잎들은 공중에서 말라가고

하다가 안 되면 고립을 택하는 것밖에는 할 게 없는 사람들은

시뻘게진 얼굴로 분노의 수위를 간신히 조절하고 있다

고립은 저희들끼리 엉키고 풀고 하면서 다시 고립을 낳는다

손도 발도 없는 고립의 새끼가 단단한 씨앗으로 여물 때

고 작은 입으로 하품을 거품처럼 터뜨리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지

203호 아가씨는 핏덩이를 떼내고 욕실 수챗구멍 속으로 흘러갔다

좀더 유쾌했더라면 좋았을까

좀더 똑똑했더라면, 좀더 돈이 많았더라면

좀더 사회성이 좋았더라면, 좀더, 좀더

냉동만두를 냄비에 넣고 끓였는데 얼음이 씹힌다

얼음도 면도칼을 숨기고 있다

추모비처럼 꽂혀 있는 밥숟가락

추모비처럼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송전탑

고개를 돌릴 때마다 자꾸 바퀴벌레가 보이는 증상을 뭐라더라

비문증? 붉은 통꽃이 통째로 공중에서 끝없이 내려온다

배수구에 잔뜩 달라붙은 머리카락들이 덜덜 떨면서 울고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저 석류나무도 잘 알고 있는 듯

여름 장마에 무거운 가지 한 쪽을 찢어 버렸다

석류나무 아래엔 일회용 쓰레기처럼 고립이 넘친다

그걸 석류나무의 선택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립은 아무도 간절히 원한 것이 아니다

방구석에 누워 온몸에 꽃이 피고 열매가 달린다 한들

혹여 당신이 분노에 휩싸여 생활 속으로 다시 복귀한다고 한들

뭐가 다를 것인가

모두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지나다니는 원룸 복도에서

출구 없는 이 세계의 불꺼진 통로에서

늙은 석류나무 한 그루가 혈흔을 지우며 서 있는 이 고립무원 속에서

 

 

 

계간창작과 비평(2016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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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박수빈

 


붉게 벌어지는 저 입을 악어라고 부르는 순간
석류는 비로소 석류라는 이름에서 벗어난다

 
빤질한 아가리가 되려고
내 안에 자라는 늪을 향해
밤이면 달빛을 베어 먹는 악어
목구멍을 조여와 달빛이 일렁거려


토해지는 이빨들은 냄새나는 주검처럼 박힌 못들
어떻게 살아 펄떡이는 말들이 되나
둥근 감촉 알알이 맺힌
핏빛 惡, 惡, 語들


턱관절을 벙긋할 때 잇몸이 으악
세상의 질서란 똑같은 발성으로 일제히 따라하는 으악


석류라고 쓰고 석양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
석유 냄새 미끄러질 때
날개는 돋치고 의미는 규정하지 않는다

 
더러 죽고 더러 깃털 흩어지지만
악어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악어들이 덤벼든다 으아악

 

 


ㅡ시집『비록 먹구름의 시간』(천년의시작,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