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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시 모음 -정한모/김현승/최승자/릴케...외

가을에 정한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 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낸 전설 속에 묻혀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墜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

조지훈 /병에게 -신표균 /당뇨 애인

병에게 조지훈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즉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

소녀와 수국, 그리고 요람 /김선우

소녀와 수국, 그리고 요람 김선우 금자동아 은자동아 우리애기 잘도잔다 금을준들 너를사며 은을준들 너를사랴 자장자장 우리애기 자장자장 잘도잔다 죽음은 자연스럽다 캄캄한 우주처럼 별들은 사랑스럽다 광대한 우주에 드문드문 떠 있는 꿈처럼 응, 꿈 같은 것 그게 삶이야 엄마가 고양이처럼 가릉거린다 얄브레한 엄마의 숨결이 저쪽으로 넓게 번져 있다 아빠가 천장에 나비 모빌을 단다 무엇이어도 좋은 시간이 당도했다 * 엄마는 많이 잔다 걸음마를 배우기 전 아이처럼 자다가 깨 배고프면 칭얼거리고 아기 새처럼 입 벌려 죽을 받아먹고 기저귀 가는 손길을 귀찮아하다가도 아기용 파우더 냄새가 퍼지면 기분좋아한다 아빠가 외출하면 악다구니를 쓰며 울고 아빠가 돌아와 손잡아 주면 평온해진다 돌보는 손길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가끔 축복..

아들의 여자 /정운희

아들의 여자 정운희 아들의 주머니 속 여자 잘 웃는 햄스터처럼 구르는 공깃돌처럼 때론 모란꽃처럼 깊어지는 여자 노란 원피스의 그녀가 온다 한두 걸음 앞장 선 아들을 깃발 삼아 잡았던 손을 놓았던가 얼굴이 달아오르는 유리창 어깨를 타고 흔들리는 백 주머니 속에서 느꼈을 봉긋한 가슴 나는 떨어지는 고개를 곧추세우려 커피 잔을 들었다 아들은 비어 있는 내 옆자리를 지나쳐 맞은편에 나란히 앉았다 여자를 향해 조금 더 기울어져 있는 어깨 조금 더 명랑한 손가락들 알처럼 둥근 무릎 빨대를 물고 있는 구멍 속 우주처럼 아들의 주머니 속에서 눈을 뜨고 감는 여자 식사 중에도 길을 걷다가도 주머니 속 여자와 입 맞추며 혹은 만지작거리며 깔깔거리다가 뜨거워지다가 때론 예민해지기도 하는 즐거운 방식으로 들락거리는 곰 발바닥..

아들에 대한 시 모음

젊은 사랑 ―아들에게 문정희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 왜 나는 너룰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때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사랑 한 알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시집 『어린 사랑에게』(미래사, 1991)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9』(국립공원, 2007) ----------------------------------------- 아들에게 김명인 풍랑에 부풀린 바다로부터 항구가 비좁은 듯 배들이 든다 또 폭풍주의보가 내린 게지, 이..

소금쟁이 /정연희

소금쟁이 정연희 비 온 후 둥둥 떠 있는 물에 젖지 않은 글자들 까막눈 노인도 아이도 읽을 수 있는 웅덩이가 키우는 유유한 글자들이다 간혹 두 손으로 재빠르게 뜨면 어쩌다 잡히는 귀한 훈계들 정교한 다리의 각도는 지게의 짐을 버티던 다리와 다리 사이의 각도다 저 생존의 각도, 아버지의 아버지가 버텨오던 모습 불거진 힘줄의 시간과 무거운 어깨의 힘이 새겨져 있다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온 힘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물을 누르고 낭랑하게 뛰는 저 찰나의 힘 자식을 떠받치는 다리의 기적 부성의 각도 ―시집『나무가 전하는 바람의 말들』(시인수첩, 2923)

기울어짐에 대하여 /문숙

기울어짐에 대하여 문숙 한 친구에게 세상 살맛이 없다고 했더니 사는 일이 채우고 비우기 아니냐며 조금만 기울어져 살아보란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노쳐녀로만 지내던 그 친구도 폭탄주를 마시고 한 남자 어깨 위로 기울어져 얼마 전 남편을 만들었고 내가 두 아이 엄마가 된 사실도 어느 한때 뻣뻣하던 내 몸이 남편에게 슬쩍 기울어져 생긴 일이다 체게바라도 김지하도 기울어져 세상을 보다가 혁명을 하고 시대의 영웅이 되었고 빌게이츠도 어릴 때부터 기울어진 사고로 컴퓨터 신화를 일궈 세계 최고 부자가 되었다 보들레르도 꽃을 삐딱하게 바라봐 악의 꽃으로 세계적인 시인이 되었고 피사탑도 10도 기울어져 세계적인 명물이 되었다 노인들의 등뼈도 조금씩 기울어지며 지갑을 열 듯 자신을 비워간다 시도 안 되고 돈도 안 되고 ..

얼굴 반찬 /공광규

얼굴 반찬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 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 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시집『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 2008) 언제부턴가 혼밥이라는 말이 일상에서 식상한 말처럼 유통이 되고 있다. 다음 어학사전에도 올라와 ..

[박정호 논설위원이 간다] 순간을 찍고 감흥을 읊고..시인이 따로 있나

[박정호 논설위원이 간다] 순간을 찍고 감흥을 읊고..시인이 따로 있나 박정호입력 2020. 5. 6. 00:49수정 2020. 5. 6. 06:47 사진과 만난 5행 안팎의 짧은 시 새로운 형식의 문학 장르로 부상 잡지·동호회·지역공모전 잇따라 "아직 사진설명 수준 많아" 일침도 ━ 스마트폰 시대의 문학 ‘디카시’ 신록의 5월이 익어간다. 코로나19 대재앙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은 올봄도 여름에 자리를 물려줄 채비를 하고 있다. 우리네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바이러스의 공습으로 수많은 이웃이 아파했지만 산야를 수놓은 꽃들 덕분에 그나마 적잖은 위안을 받았다. 여기 울긋불긋 사진 한 장이 있다. 하늘을 향해 솟구치려는 붉고 노란 꽃들의 합창에 초록빛 잎새가 반주를 넣는 듯하다. 사진 가득 에너지가 넘친다..

은둔지 /조정권

은둔지 조정권 시는 무신론자가 만든 종교. 신 없는 성당, 외로움의 성전, 언어는 시름시름 자란 외로움과 사귀다가 무성히 큰 허무를 만든다. 외로움은 시인들의 은둔지, 외로움은 신성한 성당, 시인은 자기가 심은 나무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 나는 나무에 목매달고 죽는 언어 밑에서 무릎 꿇고 기도한다. 시인은 1인 교주이자 그 자신이 1인 신도, 시는 신이 없는 종교, 그 속에서 독생獨生하는 언어. 시은市隱*하는 언어 나는 일생 동안 허비할 말의 허기를 새기리라. *세속 속에서의 운둔. ㅡ『유심』(2013. 4) ㅡ시집『고요로의 초대』(민음사, 2011) ------------------------- 시인에게 있어 ‘시’는 연인이자 애인, 오르고 싶은 나무 그리움의 대상이다. 마냥 말을 걸고 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