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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이성부

봄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50』(조선일보 연재, 2008)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5』(국립공원, 20..

새벽의 낙관 /김장호

새벽의 낙관 김장호 밤샘 야근을 끝내고 난곡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낙엽을 털어내며 새벽바람이 일어나고 버스는 봉천고개를 넘어온다 신문 배달 나간 둘째는 옷을 든든히 입었는지…… 텅 빈 버스 창가에 부르르 몸을 떨며 엉덩이를 내려 놓는다 방금 누가 앉았다 내렸을까, 연탄 크기만한 흔적이 살아있다 아직 미지근한 온기가 미소처럼 남아 있다 누구일까, 이 차가운 의자를 데운 이는 크기로 보아 술집 여인의 엉덩인가 놀음판에 개평도 얻지 못한 사내의 엉덩인가 아니다, 새벽 장 가는 아지매의 엉덩일 게다 새벽 공사판 나가는 인부의 엉덩일 게다 세상살이 흔들리며 데웠으리라 삶이란 세상에 따스한 흔적 남기는 것 나 역시 그대에게 줄 미소 하나 만든다 새벽에 찍는 하루의 낙관 ―『詩로 여는 세상』(2014. 봄) ―시집 ..

내가 죽거든 /크리스티나 로제티

내가 죽거든 크리스티나 로제티 사랑하는 사람아, 내가 죽거든 나를 위해 슬픈 노래 부르지 마셔요. 머리맡에 장미 심어 꽃 피우지 말고 그늘지는 사이프러스도* 심지 말아요. 비를 맞고 이슬에 담뿍 젖어서 다만 푸른 풀만이 자라게 하셔요. 그리고 그대가 원한다면 나를 생각해줘요. 아니, 잊으시려면 잊어주셔요. 나는 나무 그늘을 보지 않겠고 비 내리는 것도 느끼지 않겠어요. 나이팅게일 새의 구슬픈 울음 소리도 나는 듣지 않으렵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또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 누워 있어 꿈을 꾸면서 나는 그대를 생각하고 있으렵니다. 아니, 어쩌면 잊을지도 모릅니다. *사이프러스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수로서 그 나무가지는 비탄과 상장(喪章) 그리고 죽음을 상징한다. ―김희보 편저『世界의 名詩』(종로서적, 1..

황야의 건달 /고영

황야의 건달 고영 어쩌다가, 어쩌다가 몇 달에 한 번꼴로 들어가는 집 대문이 높다 용케 잊지 않고 찾아온 것이 대견스럽다는 듯 쇠줄에 묶인 진돗개조차 꼬리를 흔들며 아는 체를 한다 짜식, 아직 살아 있었냐? 장모는 반야심경과 놀고 장인은 티브이랑 놀고 아내는 성경 속의 사내랑 놀고 아들놈은 라니자와 놀고 딸내미는 딸내미는, 처음 몸에 핀 꽃잎이 부끄러운지 코빼기 한 번 삐죽 보이곤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아빠를 사내로 봐주는 건 너뿐이로구나 그것만으로 충분히 고맙고 황송하구나, 예쁜 나의 아가야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식탁에 앉아 소주잔이나 기울이다가 혼자 적막하다가 문득, 수족관 앞으로 다가가 큰 소리로 인사를 한다 블루그라스야, 안녕! 엔젤피시야, 안녕! 너희들도 한잔할래? 소주를 붓는다 ㅡ월간『..

동질(同質) /조은

동질(同質) 조은 이른 아침 문자 메시지가 온다 ―나 지금 입사시험보러가잘보라고해줘너의그 말이 꼭필요해 모르는 사람이다 다시 봐도 모르는 사람이다 메시지를 삭제하려는 순간 지하철 안에서 전화를 밧줄처럼 잡고 있는 절박한 젊은이가 보인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신도 사람도 믿지 않아 잡을 검불조차 없었다 그 긴장을 못 이겨 아무 데서나 잠이 들었다 답장을 쓴다 ―시험꼭잘보세요행운을 빕니다! ―시집『생의 빛살』(문학과지성사, 2010) ------------------- 가끔 모르는 문자 메시지를 받기도 하고 보내기도 한다. 이 사람한테 보낸다는 것이 저 사람한테 보내기도 하고 보내 놓고 바로 알기도 하고 상대방이 물어올 때까지 모를 때도 있다. 어느 날 문자를 잘못 날렸다. 날리는 순간 전화번호..

쑥국―아내에게 /최영철

쑥국 ―아내에게 최영철 참 염치없는 소망이지만 다음 생애 딱 한번만이라도 그대 다시 만나 온갖 감언이설로 내가 그대의 아내였으면 합니다 그대 입맛에 맞게 간을 하고 그대 기쁘도록 분을 바르고 그대 자꾸 술 마시고 엇나갈 때마다 쌍심지 켜고 바가지도 긁었음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의 그대처럼 사랑한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고맙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아이 둘 온 기력을 뺏어 달아난 쭈글쭈글한 배를 안고 골목 저편 오는 식솔들을 기다리며 더운 쑥국을 끓였으면 합니다 끓는 물 넘쳐 흘러 내가 그대의 쓰린 속 어루만지는 쑥국이었으면 합니다 ―시집『찔러본다』(문학과지성사, 2010) ========================================================================..

생활의 길목에서 5―임신 5

생활의 길목에서 5 ―임신 5 셋째를 가진 아내의 모습은 정말 첫 아이와 둘째 아이 때와는 달리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손과 발이 부어오르더니 부종이 점점 심해져 이제는 얼굴까지 눈에 띄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문득 둘째 애를 가졌을 때가 생각이 났다. 그때도 한 번 경험이 주는 무딤 때문에 다달이 병원에 가지를 않고 있다가 아이가 거꾸로 서 있는 바람에 멀쩡한 배에다 칼을 대서 둘째를 얻어야 했던 호된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 첫 번째 임신 때는 첫 임신이라 모르는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아 또 겁이 나서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또박또박 다니며 의사의 지시에 충실히 따른 덕분에 가정집 분위기가 느껴지는 동네의 산부인과에서도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자연분만을 했었는데 둘째 때는 그렇지를 못했다. 임신 사실..

생활의 길목에서 4―임신 4

생활의 길목에서 4 ―임신 4 아내가 족발을 그렇게 먹고 싶어 했지만 사주지 못했던 이유는 아주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내가 족발에 대해서 상당히 안 좋은 이미지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서 족발을 한 번도 먹어 본 적은 없었지만 만드는 과정을 많이 본 적은 있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직장은 동대문운동장 뒤편에 있는 신당동 시장 근처에 있었다. 그래서 항상 시장을 지나가야 했는데 거기에는 언제나 머리 고기와 족발을 팔고 있었는데 족발 만드는 과정이 영 위생적이지 않아서 모든 족발을 저렇게 만드는 줄 알았다. 시장 건물 옥상에서 돼지 발을 잔뜩 쏟아 부어 놓고는 부탄가스로 돼지 다리 털을 그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주위 환경이 상태가 지저분하고 아주 더러웠다. 게다가 무슨 기름인지..

생활의 길목에서 3―임신 3

생활의 길목에서 3 ―임신 3 지금은 다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갔지만 중학생이던 둘째 아이의 이야기인데 딸아이를 키우다 보면 재미있는 일도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 나만이 알고 있는 민망한 목욕탕 사건도 하나 있었다. 그 전과는 달리 요즘은 목욕탕에 가보면 아주 가끔 여자애를 데리고 남탕에 오는 자상한? 아빠가 어쩌다 보이는데 우리 딸애들이 돌 미만까지 매번 목욕탕에 갈 때마다 내가 데리고 다녔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는 추억이기도 하지만 지금 같으면 딸아이를 데리고 남탕에 데리고 갈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딸애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자주 갔었다. 한 번은 둘 째 아이가 탕 안에 서서 공을 물에 담갔다 건졌다 하면서 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활의 길목에서 2―임신 2

생활의 길목에서 2 ―임신 2 그 뒤 아들에 대한 아무런 욕심도 없었다. 시택이나 처가댁 주변에서 아들 없다고 해서 구박 주는 사람도 없었고 어쩌다 명절 때 한두 번 가는 고향에서 아버지로부터 딸자식은 다 쓸모없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지만 그 누구도 우리에게 아들에 대한 스트레스를 주지도 않았고 강요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간혹 누가 딸딸이 아빠라고 하면 듣기는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화낼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동네에서 장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아들 낳는 비법? 을 귀동냥으로 들을 수는 있었다. 어떤 말은 정말 황당무계하고 미신 같은 말도 있지만 여성의 체질이 산성화되어 있으면 딸 낳을 확률이 높다는 말은 신빙성이 있었다. 여자가 산성으로 된 음식을 먹고 반대로 남자가 알칼리성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