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과 사진/시 읽기

황야의 건달 /고영

흰구름과 함께 2023. 2. 21. 09:40

황야의 건달

 

고영

 

 

어쩌다가, 어쩌다가 몇 달에 한 번꼴로 들어가는 집 대문이 높다

 

용케 잊지 않고 찾아온 것이 대견스럽다는 듯

쇠줄에 묶인 진돗개조차 꼬리를 흔들며 아는 체를 한다

짜식, 아직 살아 있었냐?

 

장모는 반야심경과 놀고 장인은 티브이랑 놀고

아내는 성경 속의 사내랑 놀고

아들놈은 라니자와 놀고

딸내미는

딸내미는,

 

처음 몸에 핀 꽃잎이 부끄러운지 코빼기 한 번 삐죽 보이곤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아빠를 사내로 봐주는 건 너뿐이로구나

그것만으로 충분히 고맙고 황송하구나, 예쁜 나의 아가야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식탁에 앉아 소주잔이나 기울이다가

혼자 적막하다가

문득,

 

수족관 앞으로 다가가 큰 소리로 인사를 한다

블루그라스야, 안녕! 엔젤피시야, 안녕!

너희들도 한잔할래?

소주를 붓는다

 

 

 

월간현대시학(2007)

시집너라는 벼락을 맞았다(문학세계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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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보리 서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안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만 시 속의 화자는 어쩌다 처가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경제적 이유이든 사유가 무엇이든 어쨌든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지방으로 떠돌아다니다가 몇 달에 한 번 집에 들어오나 봅니다. 오랜만에 집에 오면 맨발로 마당까지는 나오지는 못하더라고 반갑게 맞아주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장인도, 장모도, 아이들도 심지어 아내조차 살갑게 맞아주지를 않습니다.

 

   경제적 능력으로 남편을 평가하는 세태에 아마도 돈벌이를 잘하지 못하는 사내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참으로 서글픕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대접을 못 받을 때 세상살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가장 가까운 가족조차 이렇게 대접을 하니 어디 세상살 맛이 나겠는지요. 무슨 잘못이 그리 많다고 사위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체면과 권위를 세우지 못하고 이런 푸대접을 받아야할까요.

 

   문득 병원에서 만났던 50대 초반의 한 사내가 떠오릅니다. 병원 옆 침대서 한 달 넘게 같이 있었는데 그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소속의 일용직노동자였습니다. 하지만 무늬만 대기업소속이지 하청업체에 속해서 비정규직이었습니다. 전국 곳곳을 떠돌며 하천 제방공사도 하고 도시하수관 확장 교체 같은 일을 하는데 비가 오면 일을 못하니 일당이 없다고 합니다.

 

   공휴일도 일요일도 없는 직업이 비오는 날이 쉬는 날인데 그나마 현장이 집하고 멀리 떨어져있으면 다녀오는 경비도 만만치 않아 시 속의 화자처럼 몇 달에 한 번 집을 들여다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 생활을 이십 년 넘게 하다 보니 애들이 어릴 때 안아본 기억조차 없고 어떻게 컸는지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요. 가족이란 있으나 없으나 한곳에서 부비며 언쟁도하고 의견충돌을 일으키며 미운정이 들어가는 것인데 아무래도 떨어져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멀어져가지요. 시 속의 화자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생활을 하다 보니 가족들이 마음조차 다 따로 놉니다. 다종교가 우리나라의 특징이라고는 하지만 장모와 아내의 다른 종교도 가족무관심의 원인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0년 3월 8일 씀)

 

   종교에 빠진 아내여, 수족관 앞에서 물고기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남편을 황야의 건달처럼 계속해서 버려둘 것인가요. 다른 날은 몰라도 남편이 오는 날은 성경책을 덮어버리고 삼겹살이라도 구워서 아이들을 불러내고 남편이 물고 온 세상 이야기를 안주삼아 있는 말 없는 말 하다보면 얼굴 한 번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황송해하는 빵점짜리 아빠가 50점짜리 아빠로 승격되지는 않겠는지요.

 

   분쟁 없이 간섭 없이 서로 저 좋아하는 일에 매달려 사는 것이 평화로워 보이기도 합니다만 대화가 없는 평화, 마음이 오고가지 않는 평화는 언젠가는 깨어지기 마련이지요. (2010년 3월 17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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