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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부부 /반칠환

은행나무 부부 반칠환 십 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렸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놓는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되는 것도 이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 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 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 ―월간『현대시학』(2004년 10월호) ====================================================================== 바람이라는 중매쟁이가 없었다면 어찌 두 섬이나 되는 자식을 얻을 수 있었을까 언젠가 길..

사랑의 지옥 /유하

사랑의 지옥 유하 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짓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새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의 캄캄한 감옥에 갇혀 운다 ―시집(『세상의 모든 저녁』 (민음사, 1999)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 어릴 때 꽃 속에 벌을 가둬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주로 가둔 벌은 만만한 꿀벌이었습니다. 꿀벌은 잡다가 쏘여도 독이 강하지 않고 따꼼하..

전전긍긍 /안도현

전전긍긍 안도현 소쩍새는 저녁이 되면 제 울음소리를 산 아래 마을까지 내려보내준다 방문을 닫아두어도 문틈으로 울음을 얇게, 얇게 저미어서 들이밀어준다 머리맡에 쌓아두니 간곡한 울음의 시집이 백 권이다 고맙기는 한데 나는 그에게 보내줄 게 변변찮다 내 근심 천 근은 너무 무거워 산속으로 옮길 수 없고 내 가진 시간의 밧줄은 턱없이 짧아서 그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 생각건대 그의 몸속에는 고독을 펌프질하는 또다른 소쩍새 한 마리가 울고 있을것 같고 그리고 그 소쩍새의 몸속에 역시 또 한 마리의 다른 소쩍새가 살고 있을 것도 같아서 나는 가난한 시 한편을 붙들고 밤새 엎드려 한 줄 썼다가 두 줄 지우고 두 줄 지웠다가 다시 한 줄 쓰고 지우고 전전긍긍할 도리밖에 없다 ―시선집『반경환 명시감상 1, 2』(종려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