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정한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 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낸 전설 속에 묻혀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墜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시집『여백(餘白)을 위한 서정』(1959) 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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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시집『김현승시초』.문학과사상사. 1957 : 『김현승전집1』. 시인사. 1985)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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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입니다. 여름에는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에게 결실을 명하십시오.
열매 위에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주시고, 마지막 단 맛이
짙은 포도 송이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계속 고독하게 살 것입니다.
잠자지 않고,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쓰고
그리하여 낙엽이 뒹구는 가로수 길을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헤멜 것입니다.
-김희보 편저『세계의 명시』(종로서적,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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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최승자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그런데 세월이 내게로 왔습디다
내 문간에 낙엽 한 잎 떨어뜨립니다.
가을입디다.
그리고 일진광풍처럼 몰아칩디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
오늘 내 문간에 기어이 휘몰아칩디다.
ㅡ시집『내 무덤, 푸르고』(문학과지성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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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가을
이성복
그해 가을 나는 아무에게도 편지 보내지 않았지만
늙어 군인 간 친구의 편지 몇 통을 받았다 세상 나무들은
어김없이 동시에 물들었고 풀빛을 지우며 집들은 언덕을
뻗어나가 하늘에 이르렀다 그해 가을 제주산 5년생 말은
제 주인에게 대드는 자가용 운전사를 물어뜯었고 어느
유명 작가는 남미기행문을 연재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여기 계실 줄 몰랐어요
그해 가을 소꿉장난은 국산영화보다 시들했으며 길게
하품하는 입은 더 깊고 울창했다 깃발을 올리거나 내릴
때마다 말뚝처럼 사람들은 든든하게 박혔지만 햄머
휘두르는 소리, 들리지 않았다 그해 가을 모래내 앞
샛강에 젊은 뱀장어가 떠오를 때 파헤쳐진 샛강도 둥둥
떠올랐고 고가도로 공사장의 한 사내는 새 깃털과 같은
속도로 떨어져내렸다 그해 가을 개들이 털갈이 할 때
지난여름 번데기 사 먹고 죽은 아이들의 어머니는 후미진
골목길을 서성이고 실성한 늙은이와 천부(天賦)의 백치(白痴)는
서울역이나 창경원에 버려졌다 그해 가을 한 승려는
인골로 만든 피리를 불며 밀교승이 되어 돌아왔고 내가
만날 시간을 정하려 할 때 그 여자는 침을 뱉고 돌아섰다
아버지, 새벽에 나가 꿈 속에 돌아오던 아버지,
여기 묻혀 있을 줄이야
그해 가을 나는 세상에서 재미 못 봤다는 투의 말버릇은
버리기로 결심했지만 이 결심도 농담 이상인 것은
아니었다 떨어진 은행잎이나 나둥그러진 매미를 주워
성냥갑 속에 모아두고 나도 누이도 방문을 안으로
잠갔다 그해 가을 나는 어떤 가을도 그해의 것이
아님을 알았으며 아무것도 미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비하시키지도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
아버지, 아버지! 내가 네 아버지냐
그해 가을 나는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을 다 살아
버렸지만 벽에 맺힌 물방울 같은 또 한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가 흩어지기 전까지 세상 모든 눈물이 잠기지
않은 것을 나는 알았고 그래서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들이
매장 끝내고 소풍 갈 준비를 하는 것을 이해했다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그해 가을, 가면 뒤의 얼굴은 가면이었다
―시집『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지성사, 1980)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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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고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계간『창작과비평』(1969, 가을 겨울 합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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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기도
김남호
주여, 죄를 짓기 좋은 계절이 왔나이다
날로 짧아지는
저 발기부전의 햇볕을 이어서
죄를 도모하게 하소서
난로를 쬐게 하기 위해 손을 만드시고
동동 구르게 하기 위해 발을 만드셨듯이
따뜻한 위로를 만들기 위해 불행한 이웃들을
더욱 더 불행하게 하소서
당신이 당신을 위해
죄를 짓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를 위해 지은
빛나는 죄들이 흐려지기 전에 새로운 죄를
짓게 하소서 이 비옥한 시간에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계간『문학마다』(가을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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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편지
고정희
예기치 않는 날
자정의 푸른 숲에서
나는 당신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창가에 늘 푸른 미루나무 두 그루
가을 맞을 채비로 경련하는 아침에도
슬픈 예감처럼 당신의 혼은 나를 따라와
푸른색 하늘에 아득히 걸렸습니다.
나는 그것이 목마르게 느껴졌습니다.
탁 터뜨리면 금세 불꽃이 포효할 두 마음 조심스레 돌아 세우고
끝내는 사랑하지 못할 우리들의 우둔한 길을 걸으며,
<형이상학>이라는 고상한 짐이 무거워
시인(詩人)인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당신을 내 핏줄에 실어 버릴 수만 있다면,
당신이 그 참담한 정돈을 흔들어 버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다시 한번
이 세계 안의 뿌리를 일으켜 세울 수만 있다면,
하늘로 걸리는 당신의 덜미를 끌어내려
구만리 폭포로 부서져 흐르고 싶었습니다.
―고정희 지음『고정희 시전집 세트 1』(또하나의문화,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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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편지
고정희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해 열린 문 닫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
―고정희 지음『고정희 시전집 세트 2』(또하나의문화,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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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편지
정일근
청솔당聽蟀堂 나무우체통 열어보다 가을이 은현리 819번지 시인에게 보낸 긴 편지한 장 받았습니다
귀뚜라미 한 마리.
ㅡ시집『방!』(서정시학,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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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편지
권순진
지난밤 옹골차게 퍼붓던 비로
강은 방죽 어깨까지 불어나고
강물은 온통 가을 색으로
사람 뜀박질보다 몇 배는 더 빠르게
바다를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바다 해수욕장 간이 천막은
접혀진지 한참이지만
8월의 달력은 오늘에야 찢겨져 나갔습니다
한동안 여름 속의 가을인지
인디언의 여름이라고 하는 가을 속의 여름인지
어정쩡한 망설임도 이젠 안녕입니다
그러나 얼마동안 사람들은
반소매 차람의 보행이어도 탈 없고
둔한 매미는 귓바퀴를 도는 이명으로 남아
우리들의 지난 여름을 추억케 할 것이며
성가신 모기는 노련한 테러리스트처럼
여전히 우리의 붉은 피들을 노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 있게 가을이라 말합니다
잎이 꼭 발갛게 물들었다거나
하늘이 유난히 높아져서가 아니라
문득 먼 곳 상류의 강물처럼 흘러와
그립고 생각나는 사람 몇몇
오늘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걸 보면
가을은 정말 가을인가 봅니다
키 크고 어깨 넓은 사내의 팔뚝에
대롱대롱 매달려 살고 싶다던 인경이는
차인표 같은 남자를 만나 잘 살고 있기나 한지
그렇다면 지금도 그 팔뚝의 근력은 건재한지
혹시 하중이 많이 불어난 탓에
맥없이 고꾸라지고 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여름만 되면 그 지독한 겨드랑이 땀 냄새로
시집이나 제대로 갈 수 있을지
내내 우울했던 그러나 착하디 착한 순희는
소원대로 여름 한철 사람들과 덜 마주쳐도 좋을
선생님이 되어 있는지 행여 그깟 땀샘 탓에
지난 여름을 우울하게 지냈던건 아닌지
영화배우가 되고싶다던 문방구집 아들 석하는
썩 잘난 얼굴이 아니라서
브라운관에 가끔 쿤 얼굴로 슬쩍 잡히기만 하여도
원 없이 기쁘겠다며 빛나는 조연을 소망하였는데
한 번도 그의 얼굴을 만날 수 없어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늙어 가는지 궁금합니다
에스법대 출신 교수로 명망 있는 시민운동가로
그러면서도 나 같은 어리벙벙한 친구들과도
곧잘 어울려 소주 께나 나발 불었던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 죽고 없는 현직이는
어느 어둠의 깊은 골짜기를 헤메고 있을지
아니면 자유와 정의의 맑은 땅 위에서
가랑비 흐뭇하게 온몸으로 맞고 있을지
그의 근황이 몹시도 궁금합니다
그 친구들 말고도 이 가을은
많은 사람을 생각나게 하고
많은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 전하고 싶고
수줍고 어눌했던 내 지난 모습과 더불어
그리다 만 사랑의 물감 재료가 굳어진 채
엉겨붙은 양철 팔레트로도 추억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에게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웠으며
그때는 참 즐거웠고 행복했다고
많이 보고 싶고 지금은 더 많이 참고 있다고
-시집『낙법』(문학공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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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홍해리
거대한,
투명한 공이
통, 통, 통,
튕기며
굴러가는
소리,
솔바람 냄새
난다고,
적어 보낸
오색 엽서를
또르르, 또르르르
읽고 있는
귀뚜라미,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는
달.
―시집『비밀』(우리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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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누이에게
김용택
누이야
어느 배고픈 날 내 앞에 쏟아지는 햇살이 갑자기 퇴색되어 있고
나무 밑에 바람이 일 때 바람소리는 스산하고
쳐다보는 하늘이 너무 깊어 어지러울 때 나는 가을잎처럼 흔
들린다
내 전신을 어루만지는 햇살은 아직 따사롭다
문득, 다가가서 손 잡을 사람이 그리웁구나
나는 야위어가고 잎잎 사이로 눈부신 하늘이
언뜻언뜻 어느 얼굴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비친다.
아침 안개 자욱하고 때로 손 시린 서리로 가을 꽃들은 서둘러
피고 진다
누이야, 올해는 산산이 산국들이 무슨 뜻인지 더 흐드러지는구나
저물녘, 바람은 더욱 불어대고 꽃들은 더욱 깊이 쓰러진다
저 지는 해를 넋놓아 바라봄은
내가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혹은 누이야, 내 죄로도 내 부끄러움이 너무 많은 까닭이다
꽃을 들여다보면 꽃은 지워지고 화사한 얼굴 하나가 다시 지워진다
내 한 발 디딜 땅이 너무 넓어 문득 멈춘다
여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막막한 울음과 울음 뒤에 오는 어둠
어둠 속에 어둠을 익히며 듣던 그 선연한 물소리 바람소리 풀
벌레소리
내 사랑은 여울여울 그렇게 서러움으로 돌아갔다
이제 햇살이 줄어들고
나에게 부를 이름이 없다
누이야, 내 그림자로 내 무엇 하나도 숨길 수 없음을 나는 안다
모두 떠나가고 모두 남은 들판 가득 달빛이 내린다
나는 아직 그 자리에 서 있고, 발이 저린다
나는 무엇 하나 간직할 수 없구나
먼 마을의 감 같은 따사로운 불빛들
누이야 무엇인가 하나를 더 버리고 싶은데
달만 저리 밝고 나는 버리고 싶은 것이 생각나지 않아 이리 서럽구나
곧 눈이 하얗게 산 사이를 하염없이 딴 나라처럼
내릴 것이다
누이야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는데 겨울이 보인다
추워,
내 시린 한 손을 덥힐 온기는 이제 다른 내 한손뿐이구나
누이야
혼자 기다리는 겨울이 무섭구나
혼자 기다리는 겨울이 무섭다고
몇 번 더 그래 보면,
그래 보면 누이야
가을이 참말 같아 더 무섭구나
―시집『누이야 날이 저문다』(열림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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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김진경
1
지상에 태어나 있는 것이 슬픔처럼 다가올 때 하늘을 봅니 다 .파란 하늘에선 맑은 현들이 무수히 소리를 내고 소리의 끝을 따라가노라면 문득 그대에게 이릅니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그대여, 그대의 빈자리가 오늘따라 저리도 환한 것이 내 슬픔의 이유인지요. 환하게 빛나는 그대의 빈자리 위로 나는 내 슬픔의 새떼를 날려보냅니다. 소란스레 하늘로 퍼져가는 새떼들이 멀리 잠들어 있는 그대를 깨울지도 모르겠습니다.
2
흔들리는 갈대 사이로 점점이 흩어지는 내 슬픔의 새떼를 보는 것이 그대의 아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동터오는 노을 보며 엷은 미소라도 지으십시오. 소란스레 하늘로 퍼져가는 새떼들은 이미 슬픔을 알지 못합니다. 새떼들은 환하게 빛나는 그대의 빈자리를 지나며 뜨겁게 파고드는 파편과도 같습니다. 그것이 새떼들이 날아가 박히는 하늘이 붉게 물드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동터오는 노을을 보며 엷은 미소라도 지으십시오. 그것이 삶의 이유일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집『슬픔의 힘』(문학동네,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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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편지
이수익
네가 오는 것은
눈물겨운 기다림만으로 족하다
늘 그렇게 생각한다, 이별은 상처처럼
깊이 두렵고
가슴 저미는 일이지만
너는 왔다간 금세 가야 하니까
내 마음 위로 한닢 바람기 같은
뜬소문 같은 흔적이나 남겨 놓고
머물렀던 몇날 밤 쌓아올린 정분도 미련 없이
서둘러야 하는 발걸음처럼, 총총 떠나 버리는 너,
그래도 너를 기다리던 지난 여름 숱한 날들은
달력에 금을 긋고 바닷물의 간만을 지켜보며
한없이 즐겁고 떨리기만 하였는데....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더 이상 바람이란
품어서는 안 될 허튼 나의 욕심
네가 잊지 않고 찾아와 주는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대,
아, 젊은 情夫처럼
잠시 머물렀다간 훌쩍 가 버리는
가을,
―시집『푸른 추억의 빵』. 고려원.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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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저녁의 말
장석남
나뭇잎은 물든다 나뭇잎은 왜 떨어질까?
군불 때며 돌아보니 제 집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꾸물대는 닭들
욱박질린 달이여
달이 떠서 어느 집을 쳐부수는 것을 보았다
주소를 적어 접시에 담아 선반에 올려놓고
불을 때고 등을 지지고
배를 지지고 걸게 혼잣말하며
어둠을 지졌다
장마 때 쌓은 국방색 모래자루들
우두커니 삭고
모래는 두리번대며 흘러나온다
모래여
모래여
게으른 평화여
말벌들 잉잉대던 유리창에 낮은 자고
대신 뭇 별자리들 잉잉대는데
횃대에서 푸드덕이다 떨어지는 닭,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
나뭇잎은 물든다
―시집『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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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가을
이명수
복날 삼계탕을 해 먹었다
비닐봉지에 싸둔 닭 뼈를 삼순이가 몰래 먹어치웠다
우리 내외는 닭 살을, 삼순이는 닭 뼈를
서로 나눠 먹은 셈
삼순이는 이튿날 동네 동물병원에 입원해
개복 수술을 했다 닭 뼈를 긁어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았다
수술 부위가 감염돼 VIP 동물병원으로 옮겨
또 수술을 했다
삼순이가 460만 원을 해 먹었다
나도 지난해 네 개 임플란트 비용으로 수백만 원을
해 먹었으니 개나 사람이나 그게 그거다
덕분에 우리 내외는 보름 동안 개 병문안을 했다
그러다 보니
여름이 지나고 개가 가을처럼 가까워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랴
앞으로 집에서 삼계탕을 해 먹으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놓을 뿐
개와 나는 요즘 거실을 같이 걸어다닌다
또 무엇을 해 먹을까 고민하면서
창밖에 있는 것들이 문득, 가을로 보인다
개처럼 선선하다
ㅡ시집『카뮈에게』(시로여는세상,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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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이 타는 가을 江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江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보겄네.
―계집『춘향의 마음』(사상계,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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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제사
박준
아욱 줄기가 연해지기 시작하면
우리의 제사도 머지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저는 시장에 나가
참조기와 백조기를 번갈아 바라보거나
알 굵은 부사를 한참 동안 만지다 내려놓고는
우리가 함께 신어도 좋았을
촘촘한 수의 양말을
무늬대로 골라 돌아오곤 했습니다
ㅡ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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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설명서
서주영
점점 내려앉는 강의 기슭,
발을 숨긴 고요가 저녁의 허리를 꺾고 있다
야윈 발목이 끌고 가는 당신의 발자국 소리 듣는다
지난밤, 주변을 서성이던 바람은
마른풀들이 무서리와 마주하는 동안
쑥부쟁이 구절초 산국 감국으로 꽃수레를 만들었을까
꽃수레를 밀고 가는 계절의 어깨는 그믐달처럼 기울고
수의를 걸친 주검들, 한없이 가볍다
저녁이 한마디 비명도 없이 넘어지고
서늘한 의문을 베고 누운 당신은 저 홀로 홀쭉하다
가야 할 이유도 모르고 캄캄한 벼랑을 타다가
기슭을 놓쳐버리고 혼절한 강물,
숙성된 슬픔에
당신의 구겨진 뒷모습이 반짝인다
ㅡ계간『시와사람』 (201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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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가을
이재무
움켜쥔 손 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집착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
그렇게 네가 가고 나면 내게 남겨진 가을은
김장 끝난 텃밭에 싸락눈을 불러올 것이다
문장이 되지 못한 말(語)들이
반쯤 걷다가 바람의 뒷발에 채인다
추억이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사한 것
먼 훗날 내 가슴의 터엔 회한의 먼지만이 붐빌 것이다
젖은 얼굴의 달빛으로, 흔들리는 풀잎으로, 서늘한 바람으로,
사선의 빗방울로, 박 속 같은 눈꽃으로
너는 그렇게 찾아와 마음의 그릇 채우고 흔들겠지
아 이렇게 숨이 차 사소한 바람에도 몸이 아픈데
구멍난 조롱박으로 퍼올리는 물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ㅡ계간『몸에 피는 꽃』(창작과비평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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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힘
고경자
모든 것들이 정상이었다
너를 거기에 남겨두고 온 것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고
다시 만나러 갈 용기도 없으니
비행기로 치면 안전궤도에 진입했는데
자꾸 돌아보게 하는 이것은
가을이라는 계절이 당기는 힘,
우연히 만난 행성 하나를
몇 광년 거리에서 오래 바라보게 하는 일이다
낙엽이 지는 즐거운 오후의 한 때가
그늘진 한 평의 시간을 끌어안고
가을 서막 한 장을 펼치고 있다
우체국에서 가면
쓰지 못한 엽서 한 장과
조각난 추억의 한 면을 맞추지 못해
돌아서 오는 어느 가을날,
는개비 내리고 하늘에는
내가 타야 할 비행기 한 대가 낮게 날며
가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웹진『시인광장』(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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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우체국
이기철
외롭지 않으려고 길들은 우체국을 세워 놓았다
누군가가 배달해 놓은 가을이 우체국 앞에 머물 때
사람들은 저마다 수신인이 되어
가을을 받는다
우체통에 쌓이는 가을 엽서
머묾이 아름다운 발목들
은행나무 노란 그늘이 우체국을 물들이고
더운 마음에 굽혀 노랗거나 붉어진 시간들
춥지 않으려고 우체통이 빨간 옷을 입고 있다
우체통마다 나비처럼 떨어지는 엽서들
지상의 가장 더운 어휘들이 살을 맞댄다
가을의 말이 은행잎처럼 쌓이는
가을 엽서에는 주소가 없다
―시집『나무 나의 모국어』(민음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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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우체국에서
정문규
지금까지 받은
사랑의 선물
다시 돌려드립니다
너무나 많이 받아
더 이상 저장할
공간이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단풍잎 제 마음도
함께 부칩니다
그 동안 다정했던
봄과 여름도
고마웠습니다
답장은 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하얀 겨울로 가는
망각의 열차를 탔거든요
안-녕-히-계-세-요
―시집 『행복 체인점』(문학공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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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우체국
문정희
가을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다가
문득 우체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인보다 때론 우체부가 좋지
많이 걸을 수 있지
재수 좋으면 바닷가도 걸을 수 있어
은빛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낙엽 위를 달려가
조요로운 오후를 깨우고
돌아오는 길 산자락에 서서
이마에 손을 동그랗게 얹고
지는 해를 한참 바라볼 수 있지
시인은 늘 앉아만 있기 때문에
어쩌면 조금 뚱뚱해지지
가을 우체국에서 파블로 아저씨에게
편지를 부치다가 문득 시인이 아니라
우체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가 아니라 내가 직접
크고 불룩한 가방을 메고
멀고먼 안달루시아 남쪽
그가 살고 있는
매혹의 마을에 닿고 싶다고 생각한다
―안도현 외 지음『소월시문학상작품집』(문학사상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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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한 권
최혜옥
저문다는 것은 가벼워지는 것
잎잎이 새겨진 최후의 열정은 붉은빛이다
물기 한 점 없는
노을을 표절한 문장이 이토록 뜨거운가
사족을 지우는 나무들
같은 무늬로 집단 투신하는
저 몸짓은 사선 또는 곡선이다
몸으로 쓰는 곡진한 사연
읽기도 전에 받침이 빠지고 탈자가 늘어난다
바람이 불 때마다 문맥이 뚝뚝 끊어진다
나무의 변심을 의심치 않고,
고요히 더 고요히
가벼이 더 가벼이
퇴고 중인 가을 한 권
붉은 유서가 기록되는 허공이 어지럽다
ㅡ시집 『왼손의 애가』(지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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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빛
장석남
누군가 울먹이며 지나갔는가
일개 소대의 코스모스들이 허리마다 올올이 바람을 감고 서서
이제 더 오래 못 서있을 빛을 내내
빛내고 있었으니
이 빛깔들은 이후 어느 길목을 돌아
어디로 종종이며 흐를 것인가
그것이 눈물겨운 것은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밥을 끓이고 있는
추억의 이마가 너무 푸르러서만이 아니라
내가 가는 길이
종내는 혼자서 저렇게 허리에 바람을 감은 길이라는
이 가을 속 조용한 손님의 말씀이 있었으니
누군가 엉엉 울고 갈 이가 있어서
또 그가 손목을 만지작이며 걸리는
작은 새끼들의 울음도 있어서
낮에 나온 달이 저렇듯 오랫동안 창백하게
이 근처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두커니 오동나무도 한 주 서 있는 것은 아닌가
ㅡ시집『젖은 눈』(문학동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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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수수밭에 서면
이준관
가을 수수밭에 서면
나는 수수깡 안경을 쓴 소년이 된다
수수깡 안경을 쓴 잠자리가
수수 이삭에 앉아
얄랑열랑 시소를 타고
수수 이삭은
수수비가 되어
하늘을 파랗게 쓴다
수수알 까먹으며
수수알처럼 총총총 박혀 있는
별을 세는
나는 수수깡 소년
수숫대 울타리 너머
나를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 들린다
이 세상 모든 잡귀를 몰아내준다며
어머니가 쪄 주던
수수팥떡 그리워
나는
수수목처럼
자꾸만 목이 길어진다
ㅡ계간『딩아돌하』(201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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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역
남유정
산사나무 열매 붉은 길
소슬바람이 긴 문장을 흘리며
지나간다
높고 시린 하늘로 새떼가 날아오른다
한쪽에서 구절초는
혼자 피었다
조용히 지는 중
지는 데 여러 날이어서
연보랏빛 방에
풀벌레 울음을
키우는 중
떠나는 것들이 다정히
붐비는 가을역에선
느릿느릿 걸어가던 발걸음도
잠시 멈춰야 한다
—계간『문학청춘』(2011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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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살이 보여주었다
송영희
물푸레나무도
보리수나무도
여름철, 달개비도 억새도
한 벌 겉옷으로 한 세상 산다
밤새 이슬 맞은 몸 아침 햇살에
요리조리 말려가며
철 따라 빛깔만 물들여 산다
어쩌다 비 내리면 하늘 빛에 말끔히
빨아 다려서
반짝반짝 행복해하는 것들,
한 벌 옷의 생
바래고 낡아 그 삶 야들야들해질 때까지
점점이 붉은 상처로 바스러질 때까지
결국엔 그마저 떨구고
저 한 줌 햇살 아래 놓여 있는
마더 데레사의 생
ㅡ시집『마당에서 울다』(시인동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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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꽃
정호승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 있던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황국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동안 나를 이긴 것은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
ㅡ정호승 꽃시그림집『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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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잎사귀
복효근
귀, 잎사귀라 했거니
봄 새벽부터 가을 늦은 저녁까지를
선 채로 귀를 열고 들어왔나니
비바람에 귀싸대기 얻어터져가며 세상의 소리 소문
다 들어왔나니 그리하여 저 귀는
바야흐로 제 몸을 심지삼아 불 밝힌 관음(觀音)의 귀는 아닐까
이 가을날 물드는 나무아래서면
발자국소리 하나 관절 꺾는 소리 하나도 조신하여라
하나도 둘도 몇 십도 몇 백도 아닌
저 수천수만의 귀들이 경청하는 이 지상의 한때
그러니 가을나무아래서는
아직도 상기 핏빛으로 남은 그리움이랑
발설하지도 못한 채 깊이 묻은 억울한 옛사랑이랑
죄다 일러바쳐도 좋겠다
이윽고 다 듣고는 한 잎 한 잎 제 귀를 내려놓는 나무아래서
끝끝내 말하지 못한 심중의 한 마디까지* 다 들켜놓고는
이제 나도
말로써 하는 지상의 언어를 다 여의고
묵묵하게 또 한세상 기다리는 나무로 돌아가도 좋겠다
* 소월의 「초혼」에서
―시집『목련꽃 브라자』(천년의시작,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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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소원
이시영
내 나이 마흔일곱,
나 앞으로 무슨 큰일을 할 것 같지도 않고
(진즉 그것을 알았어야지!)
틈나면(실업자라면 더욱 좋고)
남원에서 곡성 거쳐 구례 가는 섬진강 길을
머리 위의 굵은 밀잠자리떼 동무 삼아 터덜터덜 걷다가
거기 압록 지나 강변횟집에 들러 아직도 곰의 손발을 지닌
곰금주의 두툼한 어깨를 툭 치며
맑디맑은 공기 속에서 소처럼 한번 씨익 웃어보는 일!
ㅡ시집『사이』(창비,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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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소묘
박동진
약천사 돌확 속
산란 끝낸 잠자리 한 마리
동안거 준비하는 수련 곁에서
양 날개 쭈욱 펴고 입적하셨다
죽었나 살았나,
벚나무 가지에 걸린 조각구름이
살살 건드려보는데
점정(點睛) 앞둔 약사여래의 약탕기에
무슨 특효약이 들어있는지
대광보전 불상 앞에 엎드린 중생들 엉덩이
천근만근이다
혹여 그대도
물 바튼 작은 웅덩이 안에서 심란할까
염려스럽네
ㅡ시집『유배일기』(생각나눔,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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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부근
정일근
여름내 열어놓은 뒤란 창문을 닫으려니
열린 창틀에 거미 한 마리 집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거미에게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호박잎이 무성한
뒤뜰 곁이 명당이었나 봅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 더위가 묻어나는 요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일이나, 새 집을 마련하는 일도
사람이나 거미나 힘든 때라는 생각이 들어
거미를 쫓아내고 창문을 닫으려다 그냥 돌아서고 맙니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ㅡ시집『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시와시학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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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김종길
먼 산이 한결 가까이 다가선다.
사물의 명암과 윤곽이
더욱 또렷해진다.
가을이다.
아 내 삶이 맞는
또 한 번의 가을!
허나 더욱 성글어지는 내 머리칼
더욱 엷어지는 내 그림자
해가 많이 짧아졌다.
- 시집『해가 많이 짧아졌다』(솔,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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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바다에 오지 마라
정윤천
가슴에 재가 남은 사람은
가을 바다에 오지 마라
초가을 바다에서는 흙피리 소리가 난다
댓이파리 쓸리는 걸음 무늬를
낮아져 가는 물 위에 새겨 두고
여름의 끝 바람 몇 떨기가
사람들의 마을에서 멀어져갈 때
어디선가 저렇게 소리 구멍을 빠져나와
제멋대로 끼룩이는
가을 바다의 피리 소리 가까이 귀를 적시면
낮아질수록 푸르러지며
주저앉을 듯 한사코 일어서던……
깊은 음절의 계명들
버릴 것들을 미처 다 비우지 못한 사람은
가을 바다 근처에 와서 뒤채지 마라
보낼 것들을 다 떠나보낸 자리에서
초가을의 바다는 혼자서 제 문을 연다.
ㅡ시집『구석』(실천문학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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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빗소리
오세영
한편의 교향악인가?
불어서, 두드려서, 튕겨서 혹은 비벼서
음(音)을 내는 악기들,
가을 밤 비 내리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피아노를 치는 담쟁이 잎새,
실로폰을 두드리는 방울꽃,
바이올린을 켜는 구절초,
트럼펫을 부는 나팔꽃,
북을 울리는 해바라기,
빛이 없는 밤에는 꽃들도 변신해 모두
악기가 된다.
비와 바람과 천둥이 함께 어우르는,
실은 신(神)이 지휘하는 자연의
대 오케스트라 연주(演奏).
낮게 혹은 높게, 작게 혹은 크게
화음(和音)을 이루는 그 아늑한 선율이여.
일상의 소음에 지친 우리를
사르르 잠들게 하는 가을 비
그 빗소리여.
—시집 『가을 빗소리』(천년의시작, 201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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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수력학(水力學)
마종기
그냥 흐르기로 했어.
편해지기로 했어.
눈총도 엽총도 없이
나이나 죽이고 반쯤은 썩기도 하면서
꿈꾸는 자의 발걸음처럼 가볍게.
목에서도 힘을 빼고
심장에서도 힘을 빼고
먹이 찾아 헤매는 들짐승이 되거나 말거나
방향 없는 새들의 하늘이 되거나 말거나
암, 그렇고 말고,
천년짜리 장자(莊子)의 물이 내 옆을 흘러가네,
언제부터 발자국도 없이
타계(他界)한 꿈처럼 흘러가네.
ㅡ문정희 시배달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2016년 07월 26일)
ㅡ시집『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문학과지성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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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가을
노향림
가난한 새들은 더 추운 겨울로 가기 위해
새끼들에게 먼저 배고픔을 가르친다.
제 품속에 품고 날마다 물어다 주던 먹이를 끊고
대신 하늘을 나는 연습을 시킨다.
누렇게 풀들이 마른 고수부지엔 지친
새들이 오종종 모여들고 머뭇대는데
어미 새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음울한 울음소리만이
높은 빌딩 유리창에 부딪쳐 아찔하게
떨어지는 소리만이 가득하다.
행여 무리를 빠져나온 무녀리들 방향 없이
빈터에서라도 낙오되어 길 잃을까
드문드문
따듯한 입김 어린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다.
그 지시등 따라 창 밑까지 선회하다가
있는 힘 다해 지상에서 가장 멀리 치솟아 뜬
허공에 무수히 박힌 까만 충치 자국 같은 비행체들
캄캄한 하늘을 날며 멀리로 이사 가는
철새들이 보이는 가을날의 연속이다.
―시집『푸른 편지』(창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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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소묘
박동진
약천사 돌확 속
산란 끝낸 잠자리 한 마리
동안거 준비하는 수련 곁에서
양 날개 쭈욱 펴고 입적하셨다
죽었나 살았나,
벚나무 가지에 걸린 조각구름이
살살 건드려보는데
점정(點睛) 앞둔 약사여래의 약탕기에
무슨 특효약이 들어있는지
대광보전 불상 앞에 엎드린 중생들 엉덩이
천근만근이다
혹여 그대도
물 바튼 작은 웅덩이 안에서 심란할까
염려스럽네
ㅡ시집『유배일기』(생각나눔,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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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된 가을
서영택
먼저 도착한 편지가 푸르다
기다리다 펼쳐보는 볕이 깊어지는 날들
창가에 푸른 하늘이 배달되었다
국화가 국화 속으로 들어갈 때
가을에서 가을까지의 거리를 생각한다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에 대하여
구름이 내려앉은 산의 이마
계절은 깃발을 흔들며 손 내밀고
너에게로 가는
꽃들의 무릎은 온통 가시덤불 투성이다
갈색으로 군림하는 굴참나무 숲을 지나
낙엽 부대가 행진한다
바람의 휘파람 소리가
숲의 심장 한가운데 붉은 낙관을 찍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어디로 가는가
가시덤불을 뚫고 계속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시산맥』(2015,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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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김종길
먼 산이 한결 가까이 다가선다.
사물의 명암과 윤곽이
더욱 또렷해진다.
가을이다.
아 내 삶이 맞는
또 한 번의 가을!
허나 더욱 성글어지는 내 머리칼
더욱 엷어지는 내 그림자
해가 많이 짧아졌다.
- 시집『해가 많이 짧아졌다』(솔,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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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이향
그냥 지나쳐도 되는 일에 그림자를 남기는 거라 생각해요
밤은 오지 않고, 오지 않을 걸 알면서 늦도록 기다리는 사이
밤이 지나온 길을 밤이 다시 걸어가네요
잠시 머물다 가지만 떨어진 걸 줍고
그것을 책 속에 꽂아
간간이 꺼내보는 거라 생각해요
나무 속에 나무는 강을 따라 흘러갔는데
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고
흘러가버린 것들이 그렇듯
언젠가 나무도 제 그림자를 들고 돌아올 거라 생각해요
―『문학·선』(2014.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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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미루나무 2.
김영호
바람에 낙엽을 떨구며 서있는 미루나무
하늘에 회개의 편지를 쓰는 사람 같네.
먼 친구에게 용서의 편지를 쓰는 사람 같네.
자신에게 반성의 편지를 쓰는 사람 같네.
잘못 살아온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쓰는 사람같네.
그의 텅 빈 심장 우체통속
낙엽만 가득하네.
―웹진『시인광장』(201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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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김사인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 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 앉아
그 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린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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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박경림
그 속은 이미 온전치 않다고 합니다
울긋불긋한 것이
천지에 깔렸다 합니다
더 속으로 들어가 보면
누렇게 변한 몰골이
오그라진 마디가
바스라진 조각이
뼈만 앙글한 줄기가 우왕좌왕인
그곳은
길이 엉켜 엉망이라고 합니다
엉망인체
서로의 사이를 유지한다고
더 이상 물들지 않는다고
천지를 집어 삼킬 것 같던
그들은 이제
―웹진『시인광장』(2013.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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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조문
채재순
떨어지는 자작나무 잎사귀에게 술 한 잔
사라지는 구절초 꽃잎에게 술 한 잔
방금 흩어진 구름 한 점에게 흰 국화 한 송이
인적 드문 솔숲에 누워있는 참새 주검에게 국화 한 송이
더 이상 꿈을 피우지 않는 청춘에게 향 한 촉
가끔씩 시들해지는 내 하루에게도 향 한 촉
늦가을, 어딘가 조문을 한 번 다녀오는 것이다
다음날 쓰다달다 말없이 고봉밥을 먹었다
그 다음날 미루었던 답신을 오래오래 쓴다
―『창조문예』(201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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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보내며
고정희
사랑하는 이여
우리가 한 잔에서 목 축이지 못하는 오늘은
우리들 겸허한 허리를 구부려
서로의 잔에 그리움을 붓자
서로의 잔이 넘치게 하자
―고정희 지음『고정희 시전집 세트 2』(또하나의문화,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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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보내며
――편지 8
고정희
성전의 두 기둥처럼 붙박힌 것이
어디 우리들 마음 뿐이랴
가을산에 올라 들을 내려다보면
흐르는 모든 것은
어제 있던 그 자리에서 흐르고
작은 풀꽃 하나가
지구의 회전을 다스리기 위해서
하늘과 땅 사이 뿌리박고 섰나니
내가 그대 춤 속으로 날아가지 못하고
그대가 나의 근심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우리들 뿌리의 참담한 정돈을 어찌 외롭다 말할 수 있으랴
오솔길에 지는 것들은 뻗어 뿌리로 손잡으리니
우리가 한잔에서 목 축이지 못하는 오늘은
그대여, 우리들 겸허한 허리를 구부려
서로의 잔이 넘치게 하자
―고정희 지음『고정희 시전집 세트 1』(또하나의문화,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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