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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와 수국, 그리고 요람 /김선우

흰구름과 함께 2024. 1. 14. 11:10

소녀와 수국, 그리고 요람

김선우


                                           금자동아 은자동아 우리애기 잘도잔다
                                           금을준들 너를사며 은을준들 너를사랴
                                           자장자장 우리애기 자장자장 잘도잔다


죽음은 자연스럽다
캄캄한 우주처럼

별들은 사랑스럽다
광대한 우주에 드문드문 떠 있는 꿈처럼

응, 꿈 같은 것
그게 삶이야

엄마가 고양이처럼 가릉거린다
얄브레한 엄마의 숨결이
저쪽으로 넓게 번져 있다

아빠가 천장에 나비 모빌을 단다
무엇이어도 좋은 시간이 당도했다

                    *

엄마는 많이 잔다
걸음마를 배우기 전 아이처럼

자다가 깨 배고프면 칭얼거리고
아기 새처럼 입 벌려 죽을 받아먹고
기저귀 가는 손길을 귀찮아하다가도
아기용 파우더 냄새가 퍼지면 기분좋아한다

아빠가 외출하면 악다구니를 쓰며 울고
아빠가 돌아와 손잡아 주면 평온해진다
돌보는 손길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가끔 축복을 전해주듯이 눈을 맞춘다

그리고 잔다
평생 잠이 모자라던 사람처럼
자고자서 모은 힘으로 어느날 훌쩍 저쪽으로 건너가려는 듯이

                    *

우리는 이제 엄마의 저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르고 작고 가볍지만 무거운
아흔두 해를 살아온 육체—
해진 뒤 지평선 너머에서 번지는 희미한 빛 같은 엄마를
만진다
바라본다
냄새 맡는다

세상에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를 만지고 바라보고 냄새 맡듯이

어딘가를 향해 막 태어나려는
우리의 소중한 아기—

기저귀를 갈고 이불귀를 여며준 동생이 엄마의 뺨에 뽀뽀하고 말한다
—언니, 엄마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 같은 시간이다, 그치?

                    *

여든일곱 살에 엄마는 요양원에 갔다
여든일곱 살인 아빠가 울며 말했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 힘에 부치는 구나

엄마를 보내놓고 아빠는 매일
요양원으로 산책을 갔다
요양원에서 엄마는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아빠가 가면 엄마는 이 말부터 물었다
—식사는 자셨어?
자식들을 다 잊어먹고 오직 아빠만 기억하는 엄마를
우리는 사랑꾼 여사라고 불렀다
평생 고생시킨 아빠가 저렇게 좋을까?
진절머리나게
진절머리난다! 그거 엄마 십팔번이었지
결혼 전에 아빠를 딱 한번 봤는데 맘에 들었다잖아
허접한 남자를 중신 선 거면 중매쟁이 발모가지를 분질러버리려고 했다네
엄마 성질이면 진짜로 발모가지 날아갔겠지
아빤 인물 덕에 엄마사랑을 평생 받은 거야 이놈의 외모지상주의!
까르르거리는 딸들의 핀잔을 들은 아빠는
엄마의 사랑을 평생 받는 유일한 남자로서 으쓱대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고
가족방문조차 극도로 제한된 시간
요양원이 어떤 곳인지 적나라해졌다
팬데믹이 끝나갈 무렵
삼년 사이 반쪽이 된 엄마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탈수증상과 염증으로 한 달을 입원했다

아빠가 울며 말했다
—요양원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 내가 잘못했다
임종은 집에서 해야지
내가 곁에 있어야지
내 곁에서 쓸쓸하지 않게 가야지
아흔두 살에 엄마는 집으로 돌아왔다
한 여자의 사랑을 분에 넘치게 받아온 한 남자가
드디어 어른이 되기 시작했다

                    *

엄마는 무사히 봄을 넘겼고
여름을 건너고 있다

                     *

동생집 화단에 수국이 피었는데
열두 살 조카 서연이가 수국을 바라보다가 말했단다
—엄마, 이 꽃 할머니께 가져다 드려야겠어

오늘은—
열두 살 소녀가 아흔두 살 여자와 놀고 있다
수국 한 송이, 꽃잎을 하나하나 뜯어
할머니 이마 위에 총총히 꽃 띠를 만들어 준다
다시 수국 한 송이, 턱을 괴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아기처럼 쌔근대는 할머니와 눈을 맞춘다
검버섯 가득한 손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엄마의 방안에 알 수 없는 투명함이 가득하다

—우리 열두 살 무렵엔 어땠을까?
그때 엄마가 지금 우리 나이네!
어느새 오십대가 된 동생과 내가 웃는다

나뭇잎 한 장 속에 나무 한 그루가 온전히 들어 있는
인생의 어떤 신비에 대해 생각하면서

엄마, 우리 모두의 소중하고 고마운 아기—

가만히 내 배꼽을 만져본다
가만히 엄마 배꼽을 만져본다

금자동아 은자동아 우리애기 잘도잔다
지나가는 바람님아 발뒤꿈치 들고가렴
자장자장 우리애기 자장자장 잘도잔다


ㅡ계간 《문학동네》(2023,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