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의 폭발적인 확장에 따른 위기
전국 곳곳에서 디카시를 쓰는 사람이 늘어나고 강의하는 곳도 많이 생겼났다.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정도로 디카시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나는 지금이 디카시 정체성의 위기라고 생각한다. 디카시 개념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디카시를 지도하는 경우를 많이 보고 있다. 중구난방이다. 사진에 5행 이내의 시를 덧붙이면 디카시가 되는 줄 안다. 사진이 작품의 반을 차지하는데, 사진을 찍는 법을 모른다는 것은 작품의 반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시도 시로 봐 줄 수 있는 시가 있고 시가 아닌 글이 있듯, 사진도 디카시가 되는 사진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일반 사진이 있다. 시적 언술도 중요하지만 사진도 시의 반이라는 개념을 등한시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와 사진이 최소한의 작품성은 있어야 한다. 디카시의 가장 큰 특징은 사진이라는 영상을 시와 접목한 새로운 문학인데, 문자보다 먼저 눈으로 읽는 사진의 끌림이 없이 장삼이사 누구나 찍을 수 있는 사진은 이미 디카시의 반은 실패한 것과 같다.
우리나라에서 디카시가 발원한지 20여 년이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이룩한 그동안의 성과는 크지만, 지금 제대로 문학의 위상을 확보하지 못하면, 사진시(phot poem)처럼 시문학의 한 장르로 인정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1839년 프랑스의 다 케르(Daguerre, Louis Jacques Mande)에 의해 카메라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200년이 넘게 발전되어 오면서 그동안 많은 시인과 문학인, 언론인이 사진에 시나 좋은 문구, 또는 메시지를 담아서 발표해왔다. 이것은 ‘사진시’라는 개념으로 확대되긴 했으나 문학의 한 갈래로 인정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진을 설명하거나 시에 사진을 덧붙이는 형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문학, 특히 시는 외면 풍경이 아니라 내면 풍경을 통하여 시인의 진술(철학)을 미학으로 하기 때문이다. 디카시라고 발표해도 사진에 정서적 울림이 담겨야 하고 언술에도 시인의 진술이 들어가야 한다. 그런것이 없으면 사진시 범주에도 들지 못할 수도 있다.
진술이 있다고 해서 디카시가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디카시 창작에도 순서가 있다. 찍어놓은 사진에 적당한 언술(진술)을 덧붙이면 디카시가 되는 줄 착각하면 안 된다. 어떤 대상에서 포착된 시적 감흥이 먼저다.
디카시는 시적 대상이 포착되어 순간적으로 떠오른 서정적 감성이 있을 때 그것을 찍고, 방금의 그 느낌이 날아가기 전의 시상(詩象/Image)을 메모하는 것이 먼저다. 영상과 1:1로 결합하여 소통 하는 현장성과 즉물성이 강조되는 시의 장르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것을 좀 더 확장하여 날시(生詩)적 서정성이 살아난다면 몇 번의 퇴고도 허용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디카시의 특장인 영상의 품질도 어느정도 확보되고, 그것의 설명이 아니라 시적 메시지, 진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시적 대상을 포착할 때에도 그 순간이 아니면 그와 같은 장면을 쉽게 얻을 수 없는 현장성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구조물이나 다른 사람의 작품, 또는 누구나 같은 형상을 포착할 수 있는 대상은 디카시의 소재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디카시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그런 연습과 확고한 개념속에서 건져 올리는 보석이다. 한 장소에서 수십 장의 사진을 찍고 디카시를 여러 편 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가볍게 얻어진 결과물로, 사진이 결합된 새로운 시 문학으로 인정 받기는 쉽지 않다. 디카시는 누구나 찍고 누구나 쓸 수 있는 문학의 트롯 같은 장르이긴 하다. 그러나 일반인이 즐기는 트롯과 가수가 부르는 트롯은 엄면히 다르다. 디카시인으로 불리려면 디카시를 제대로 쓸 수 있어야 한다. 취미로 쓰는 수준의 사람이 많다고해서 진정한 문학이 되기 힘들다.
또한 자기가 찍혀있는 사진도 디카시가 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은 내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를 스스로 찍은 셀카 사진도 있지만 그런 사진은 작품성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난 강좌에서 강조했듯 디카시는 사진의 품질도 매우 중요하다. 프로 사진가처럼 잘 찍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적어도 사진의 기본을 알고 찍되 시적 포인트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언술이 아무리 좋아도 사진의 구도나 명암, 강조하는 대상, 즉 초점이 선명하지 않은 사진 등은 안 된다. 사진이 함의하는 초점 부분이 디카시의 반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찍고 쓸 수는 있어도, 좋은 디카시는 사진과 언술이 시적 표현이어야 하며, 이 둘이 합쳐졌을 때 더 큰 의미로 확장되고 감흥이 살아나도록 해야 문학이 된다. 문학성이 별로 없는 가벼운 장르로 고착되면 문학의 갈래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디카시는 기존의 시에서 담아내지 못하는 현대인의 일생활이 된 영상을 결합하는 형태이므로 현대시를 더욱 보완, 강화하는 작품이 되어야 한다. 그렇찮으면 사진시로 취급받거나 문학의 위상을 확보해 나가기가 힘들다. 디카시를 가볍게 쓰면 그 시는 가볍게 취급받고 가볍게 외면 된다. 디카시의 발전을 위해서는 앞장 선 사람들이 어려운 이론을 동원하여 자기의 지식을 뽐내거나 자기의 위상 확보에 신경쓰기보다 문학으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도록 발전적으로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지금이 디카시의 위기라는 인식을 강하게 가지지 않으면 디카시의 질서가 세워지지 않는다. 중심이 튼튼해야 그 아류가 생겨도 다양성의 차원으로 봐줄 수 있지만 중심에 섰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안이하게 생각하여 물흐르듯 자연스런 발전에 기대다간 아류가 중심을 흔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오늘 나는 디카시의 발전을 위해서 다소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 했다. 그러나 이 밴드는 완전한 디카시를 발표하라는 공간이 아니다. 공부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여기에선 부족하더라도 자꾸 발표하면서 매주 신문이나 토요강좌 등에 인용되는 디카시를 참고하고 자기의 작품을 퇴고도 하는 공간이다. 그러면서 디카시를 제대로 써보자는 치열해야 되는 연습의 공간이다. 흔히 디카시를 잘 쓸 수 있을 때 발표하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겸손한 자세인 듯 해도 나의 경험으로는 그런 사람은 5년, 10년 후에도 지금보다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꾸 써보고 발표도 해보면서 고쳐나가는 방법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다만 문예지 등에 공식으로 발표하는 작품은 좀더 신중하게 하자는 말이다.
외람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디카시의 진정한 발전을 위하여 사명감을 가지고 제대로된 문학으로 정착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헌신하며 함께가는 우리의 이 길이 세계 디카시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나는 가지고 있다.
tip
디카시는 아래와 같이 배치하는 방법이 권장된다.
세로 편집 : (위에서 부터) 제목 ㅡ> 사진 ㅡ>시적 언술 ㅡ> _이름
가로 편집 : (왼 편에서 부터) 제목 ㅡ>사진 ㅡ>시적 언술 ㅡ> _이름
이렇게 배치하는 것은, 사진과 언술이 한 몸이라는 뜻으로, 디카시는 이렇게 쓰자는 약속이다. 그리고 시인의 이름 앞에 _을 표기하는 것은, 본문과 이름을 구분하는 의미와 나를 낮춘다는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가운데 줄(ㅡ)은 구분의 의미지만 아래 줄( _ )은 겸손의 뜻을 담고자 한국디카시학이 제안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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