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캐러멜을 우물거리며
이경림
장대비가 쏟아지지 않는 거실에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아파트와 나무와 길들을 본다 내가 안을 떠나지 않듯 비는 밖을 떠나지 않는다 천지가 밖인데 밖인 비는 어디로 가는가 천지가 안인데 안인 나는 어디로 가는가 비가 온몸으로 밖을 살듯 나는 전신으로 안을 산다 밖인 비는 레고 불록 속 같은 이 칸칸의 안을 알까? 어쨌든 비는 퍼붓는다 퍼붓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듯 비는 내린다
우산을 쓰고 빗속으로 들어간다. 내리꽂히며 튕겨 나가는 비 꽂힌 자리에 질펀히 드러눕는 비 천지사방 몸을 늘이는 비 투명한 연체동물 같은 비
누군가 우산 밑에 숨어 길모퉁이를 돌아간다 빗줄기 사이로 난 가느다란 길로 무슨 그림자 같은 것이 사라진다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자동차들이 달려간다. 장대비 쏟아진다
죽창 같은 빗속에서 한 남자를 죽이는 꿈을 꾼 적 있다. 아버지 같기도 남편 같기도 옆집 남자 같기도 했다 꿈속의 아버지, 꿈속의 남편, 꿈속의 옆집 남자는 무엇이 다른가?
밀크 캬라멜을 우물거리며 장대비가 쏟아지지 않는 복도식 아파트를 걸었다 난간 밖으로 팔을 뻗으면 장대비가 팔뚝을 적시는 길을 걸었다 층층의 빗소리 속으로 발자국들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길을 걸었다
―『시와 편견』(2023,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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