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과 사진/내 시 - 내 시조

가을의 길목에서

흰구름과 함께 2023. 2. 21. 09:11

가을의 길목에서

 

정호순

 

 

가을날 다람쥐 도토리 모으듯

시를 써서 야금야금 땅에 묻는 사람이 있었네

아는 이 알아주는 이 없이

아무도 모르게 홀로 쓰고 지웠네

 

자신의 블로그 프로필에

"바람도 없이 떨어지는 꽃잎같이 없어질 글을 쓰는 여자" 라고

자괴감이 우수에 젖어 늦은비 내리는데

병원에 입원한다는 짧은 쪽지 한 장 달랑 던지고

만추의 낙엽처럼 홀연히 사라진 사람

 

바람처럼 눈처럼 시라는 이름으로

몇 번의 쪽지를 주고받은

색깔도 음색도 알 수 없는 사람

 

떨어진 꽃잎처럼 땅에 스며든 빗물처럼

멈춰진 공간 속에 정지되어있는 사람

 

몇 년의 세월이 흐르고 또 한 해가 지나가는 이 가을

문득 생각나 탐문을 하기도 했었는데

지리산 골짝 어디쯤 요양중이라 했는데

 

홀로 낯선 곳 먼 여행을 떠났다 온 것처럼

아무 일 없었던 듯 제 자리로 다시 돌아 와

계곡을 적시는 청정수처럼 

맑고 깨끗한

시를 쓰면 좋겠네

 

 

 

⸺계간『詩하늘/통권 103호』(2021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