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상의 좋은 시는? 좋은 문예지는?|작성자 이승하
시집이 여전히 많이 간행되고 있다. 흔히 1980년대를 시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군사독재가 자행되는 과정에서 언론탄압이 자심하였고, 무크지로는 충족될 수 없는 저항적 언어에 대한 욕구가 시의 융성을 가져왔다. 지금도 나는 이성복ㆍ황지우ㆍ박남철, 그리고 김남주ㆍ박노해ㆍ백무산ㆍ김신용의 시집을 펼쳐들면 전율을 느낀다. 그 무렵에는 문학이, 특히 시가 역사와 사회와 문화의 한복판에서 지진의 진앙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최근에 모 신문사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이런 말을 했다.
대부분의 독자는 시가 지나치게 난해하거나(혹은 현학적이거나), 지나치게 길거나, 운문이 아니라 산문조면 골치가 아파 기피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명한 출판사에서 낸 시집에 그런 시가 유독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소위 메이저급 출판사에서 시집을 낸 후배시인이 시집을 보내주면 열심히, 읽고 또 읽습니다. 그런데 골치가 아프고 별다른 느낌이 없습니다.
내가 어느새 언어의 신선한 실험정신을 거부하고, 고루한, 혹은 고리타분한 시관詩觀을 갖게 된 것일까. 자책하고 반성하였다. 그런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읽어도 여전히 잘 모르겠고, 내 마음에 별다른 파문을 일으키지 않는다. 시집 한 권에 대체로 50~70편의 시가 실리는데 그중에 대여섯 편 정도는 찌르르 가슴을 울리는 것이 있어야 시집 독서에 들인 시간이 아깝지 않다. 그런데 몇 차례 통독을 했는데도 마음에 드는 시는커녕 알아들을 수 없는 암호 같은 언어의 미로 속을 헤매게 되면 짜증도 나고 화도 난다. 독자가 시집을 안 읽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집을 내는 출판사의 편집주간 몇 사람을 아는데, 요즘은 시집 초판을 2,000권 찍지 않고 1,000권을 찍는 경우가 꽤 있고, 그나마 저자가 사 가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재판, 3판을 찍는 시집은 드물다고 한다. 몇몇 기관에서 우수도서로 선정하여 시리즈가 유지되기도 한다니, 참으로 딱한 출판계 현실이다.
시란 애매하고 함축적이어서 소통이 잘 되면 안 좋은 시고, 소통이 안 되면 좋은 시라는 생각을 자신도 모르게 하는 경향이 있다. 몇 년 동안 신춘문예 당선 시들의 너무 난해하다고 말들이 많자 심사위원들이 어느 해부터는 일제히 소통 불능의 시는 뽑지 않게 되기도 하였다. 아마도 심사를 하는 동안 나이가 많이 든 심사위원들이 ‘나도 젊은이들 못지않은 감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뜻이 안 통하는 시를 뽑았는지도 모르겠다. 소통이 잘 안 되어야 좋은 시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또 하나 우려할 사항은 시집 권말에 붙는 해설에 대한 것이다. 시가 꽤 어려운 경우, 해설이 좋은 안내자 노릇을 해주면 독자는 그나마 이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웬걸, 시보다 더 어렵게 쓴 해설들이 있다. 얼마나 현학적인지, 시를 논한 학술서적을 읽는 느낌을 준다. 해설도 문학평론의 한 갈래일 텐데, 문학평론가가 창작자와 독자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해설이 현란한 언어의 버라이어티 쇼여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시낭송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지금, 시낭송이 붐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방도시에서 열린 그 대회의 열기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대회의 열기도 열기지만 시낭송의 현장에도 가보면 반응이 아주 좋다. 시낭송에 약간의 퍼포먼스가 곁들여지기도 하고, 이중창ㆍ삼중창ㆍ돌림노래 식으로 입체적으로 전개되면 전혀 지루하지 않다. 대회에서 큰 상을 받고 시낭송가를 자처하는 분들이 많은데, 전국에 수천 명이 된다. 그들이 찾는 것은 낭송에 적합한 시지 복잡한, 긴, 난해한 시가 아니다. 산문시도 나름대로 운율이 있는 법인데 시가 아닌 엄연한 짧은 산문이 시라고 문예지에 실리고 시집에 실린다.
시조시단의 대약진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시조 전문 문예지의 수가 점점 늘어나 지금은 30종은 족히 될 것이다. 그만큼 많은 시조시인이 있고, 많은 시조시집이 간행되고 있다. 이근배ㆍ유자효ㆍ이지엽ㆍ김도중 같은 분은 처음부터 시와 시조를 함께 써온 분이지만 허영자ㆍ오세영ㆍ정공량 시인이 시조집을 냈고, 구중서 문학평론가도 시조집을 다수 냈다.
동시 또한 완전히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창비와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민음사(황금가지)가 아동문학 시장에 뛰어든 이유가 있다. 동시집은 안 팔리는 책이라는 것이 출판계의 정설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예전에 소설가 이문구가 동시집을 여러 권 내 화제가 되었는데 근년에 동시집을 낸 시인들이 아주 많아졌다. 김용택 시인이야 초등학교 교사를 했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손동연ㆍ곽재구ㆍ도종환ㆍ안도현ㆍ함민복ㆍ송찬호ㆍ정공량ㆍ이정록ㆍ윤제림ㆍ박성우ㆍ함기석ㆍ조정인ㆍ안상학ㆍ손택수ㆍ장철문ㆍ김륭ㆍ유강희ㆍ이안 등의 시인이 동시집을 냈다. 이들 시인 중 다수가 ‘내 시집은 도통 안 팔리는 데 동시집은 꽤 잘 나가네.’ 하면서 놀랐을 것이다. 좀 더 찾아보면 시인 가운데 동시집을 낸 이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디카시의 유행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디카시 백일장, 디카시 문학상, 디카시 전문 문예지, 한국디카시연구소……. 영상과 활자의 절묘한 조합을 꾀하는 디카시는 한국에서 발명하여(?) 코로나19 바이러스처럼 외국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는 중이다. 김종회 문학평론가가 최근에 디카시집을 냈는데 외국에서 반응이 더 좋다고 한다. 일본의 하이쿠가 옥타비오 파스ㆍ파블로 네루다ㆍ롤랑 바르트 등의 옹호 발언에 힘입어 세계 문학시장에서 만세를 불렀는데 이제 우리의 디카시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디카시 관계자들이 호언장담하는 것을 들었다.
자유시를 쓰는 이른바 ‘시단’에서는 이런 현상에 대해 아무런 인식이 없는 듯하다. 시전문 문예지들도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시 청탁을 하고, 신작소시집에 5편 청탁하여 문학평론가를 붙어 해설을 쓰게 하고, 서평이나 계간평을 쓰게 하고, 신인상을 주면서 심사평을 쓰게 하고……. 문단행사 사진이나 싣고……. 이러니 이사 갈 때 제일 먼저 버리는 책이 문예지인 것이다.
어느 문예지에서 시조집을 낸 시인들을 모셔놓고 ‘왜 시조를 쓰고 시조집까지 내게 되었습니까?’ 하고 물어본 적이 있는가? 문예지에서 시집을 시리즈로 내는 메이저급 출판사의 편집주간들을 모셔놓고 ‘왜 시집이 예전만큼 안 나가고 있을까요?’ 하고 질문을 던진 적이 있는가? ‘하상욱의 시집을 시집이라고 해야 할까요? 엄청난 베스트셀러인데 왜 시단에서는 아무 얘기가 없지요?’ ‘나태주 시집의 인기가 단순히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왔기 때문일까요?’ ‘이 시대의 스타는 박준 시인인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문학성과 대중성을 다 갖춘 시인으로 도종환ㆍ김용택ㆍ정호승ㆍ안도현 등을 꼽을 수 있을 텐데, 이들 시인의 대중성의 요인은 무엇일까요?’ ‘이해인 수녀의 시집은 내는 족족 베스트셀러가 되는데 문학성도 어느 정도 담보하고 있는가요?’ ‘신춘문예 당선작가 문예지 신인상 당선작이 어떤 차이가 있나요?’ ‘중앙지 신춘문예 당선작과 지방지 신춘문예 당선작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신춘문예 당선자 중 문단의 미아가 많다고 하는데, 무슨 데이터가 있나요?’
이런 것에 대해 일반 독자와 시인 지망생은 궁금증을 갖고 있다. 문예지는 쟁점을 다루고 이슈를 제공해야 할 텐데, 그 문예지가 그 문예지다. 우리 시단은 지금 시낭송ㆍ시조ㆍ동시ㆍ디카시 4면의 적에 둘러싸여 그야말로 사면초가인데 돈을 들여서 문예지만 꾸역꾸역 만들고 있고, 안 팔리는 시집만 꾸역꾸역 내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몇 군데 문예지의 편집위원으로 이름을 걸어놓고 있고 팔리지도 않을 시집을 꾸역꾸역 내놓고 있다.
2019년 4월 15일부터 2020년 4월 13일까지 1년 동안, 2023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1년 동안 인터넷신문인 <뉴스페이퍼>에 ‘내 영혼을 움직인 시’라는 제목으로 시 소개 및 해설의 글을 연재하였다. 평일에는 시, 토요일에는 시조, 일요일에는 동시를 1편씩 소개하고 해설의 글을 붙였다. 2년 동안 3,000권 이상의 시집을 읽었다. 이상의 「오감도」 연작시 같은 것은 연구의 대상이 되기에는 좋지만 독자들의 영혼을 움직이기는 어렵다. 유명한 출판사에서 나오고 유명한 문학평론가가 해설을 써야지만 좋은 시는 아니다. 영혼을 전율케 하는 시, 감동이나 충격을 주는 시, 역시 1980년대가 시의 전성시대였고 90년까지는 영광이 이어졌다. 영상매체가 우리의 뇌리를 들쑤시는 오늘날, 시의 활로를 모색하는 일에 시인과 문학평론가, 문예지 편집자들이 함께 지혜를 모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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