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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시 모음...이재무, 김사인, 박형준, 이면우, 이병초, 권혁웅, 강연호...등

흰구름과 함께 2024. 4. 15. 09:40

봄밤 시 모음...이재무, 김사인, 박형준, 이면우, 이병초, 권혁웅, 강연호

 

봄밤 시 모음...이재무, 김사인, 박형준, 이면우, 이병초, 권혁웅, 강연호...등

 

봄밤

 


이재무

 

 

 

 

 

시인 박아무개가
지독한 가난에 두들겨 맞고
알코올성 치매에 영양실조에 폐암으로
중환자실 들어가 생사 넘나들던 밤
면회에서 돌아와 아내 몰래 수음을 했다
더러운 쾌락에 치를 떨며 결코 울지 않았다
여러 해의 봄 한꺼번에 흘러간 그 밤,

 


청승 신파 뒤 술상 뒤엎던 울분과
소리높여 부르던 단심가,
전화선을 타고 건너오던 물 젖은 소리
이제 너와 함께 과거에 묻는다
70년대 상경파의 불운한 생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꼬리 긴 주소를 지운다
세상에는 어제처럼
눈비 오고 바람 불고 구름 흐르고
해와 달은 떴다가 지며 묵은 달력 넘기겠지만
가던 걸음 문득 세워놓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그런 날 더러 있을 것이다

 

 

 

 


-시집『저녁 6시』(창비시선,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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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김사인

 

 

 

 

 

나 죽으면 부조돈 오마넌은 내야 돠 형, 요새 삼마넌짜리도 많
던데 그래두 나한테는 형은 오마넌은 내야 도ㅑ 알았지 하고 노가다
이아무개(47세)가 수화기 너머에서 홍시 냄새로 출렁거리는 봄밤이다.

 


   어이, 이거 풀빵이여 풀빵 따끈할 때 먹어야 되는디, 시인 박아
무개(47세)가 화통 삶는 소리를 지르며 점잖은 식장 복판까지 쳐들
어와 비닐 봉다리를 쥐어주고는 우리 뽀뽀나 하자고, 뽀뽀를 한번
하자고 꺼멓게 술에 탄 얼굴을 들이대는 봄밤이다

 


  좌간 우리는 시작과 끝을 분명히 해야여 자슥들아 하며 용봉탕
집 장 사장(51세)이 일단 애국가부터 불러제끼자, 하이고 우리집
서 이렇게 훌륭한 노래 들어보기는 츰이네유 해싸며 푼수 주모
(50)가 빈자리 남은 술까지 들고 와 연신 부어대는 봄밤이다.

 


  십이마넌인데 십마던만 내세유, 해서 그래도 되까유 하며 지갑
들 뒤지다 결국 오마넌은 외상을 달아놓고, 그래도 딱 한 잔만
더, 하고 검지를 세워 흔들며 포장마차로 소매를 서로 끄는 봄밤이다.

 


  죽음마저 발갛게 열꽃이 피어
  강아무개 김아무개 오아무개는 먼저 떠났고
  차라리 저 남쪽 갯가 어디로 흘러가
  칠칠치못한 목련같이 나도 시부적시부적 떨어나졌으면 싶은

 


  이래저래 한 오마넌은
  더 있어야 쓰겠는 밤이다.

 


 

 


-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비시선, 2007)

 

- '도와 야' 자가 붙은 전라도 사투리를 아래한글에서도 다음 카페, 블러그에서도
지원이 되지 않아 임의로 '도ㅑ' 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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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박형준

 

 

 


술에 취해 눈을 감고 택시 등받이에 기대어 있는데, 눈발이 등 속으로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등이 거리에 가득 걸려 있는데, 때늦은 눈발이 등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난데없이 등 속을 걸어가는 아이들이 보이는 것이었다
여우 구슬을 물고 도망치는 아이들이,
등 속에 아우성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들이 택시 차창에 희디흰 눈발로 스치는 것이엇다
땅에 닿자마자 금세 녹아 버리는 흰빛들이어서, 택시 기사가 어깨를 흔들었을 때는 이미 하늘로 다시 올라가고 없는 것이었다
초파일 달이 차창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시집『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있다』(창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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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박형준

 

 

 

 

 

달에서 아이를 낳고 싶다
누가 사다리 좀 다오

 


홀로 빈방에 앉아
앞집 지붕을 바라보자니
바다 같기도 하고
생각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물결 같기도 하고

 


달이 내려와
지붕에 어른거리는 목련,
꽃 핀 자국마다 얼룩진다
이마에 아프게 떨어지는 못자국들
누구의 원망일까

 


조용히
나무에 올라 발자국을 낳고 싶다

 

 

 

 

 

 

―시집『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있다』(창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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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이면우

 

 

 


늦은 밤 아이가 현관 자물통을 거듭 확인한다
가져갈 게 없으니 우리집엔 도둑이 오지 않는다고 말해주자
아이 눈 동그래지며, 엄마가 계시잖아요 한다
그래 그렇구나, 하는 데까지 삼초쯤 뒤 아이 엄마를 보니
얼굴에 붉은 꽃, 소리없이 지나가는 중이다.

 

 

 

 

 

 

 

-시집『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창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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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밤

 


  이병초

 

 

 


  공장에서 일 끝낸 형들, 누님들이 둘씩 셋씩 짝을 지어 학산 뽕나무밭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창수 형이 느닷 없이 앞에다 대고 "야 이년덜아. 내 고구마 좀 쪄도라!" 하고 고함을 질러댑니다. 깔깔대던 누님들의 웃음소리가 딱 그칩니다. 옥근이 형 민석이 형도 "내껏도 쪄도라, 내껏도 쪄도라" 킬킬대고 그러거나 말거나 누님들은 다시 깔깔대기 시작합니다

 


  "야 이 호박씨덜아, 내 고무마 좀 쪄도랑게!" 금방 쫓아갈 듯이 창수 형이 다시 목개래톳을 세우며 우두두두두 발걸음 빨라지는 입소리를 냅니다. 또동또동한 누님 하나가 홱 돌아서서 "니미 솥으다 쪄라, 니미 솥으다 쪄라" 이러고는 까르르 저만치 달아납니다. 초저녁 별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반짝반짝 반짝이고만 있었습니다.
 

 

 
 

 

- 계간『시안』(2006, 여름호)

 

- 시집 『살구꽃 피고』(작가, 2009)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작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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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에 너를 적시다

 


최승헌

 

 

 

 

 

내가 너의 몸에 초경처럼 비밀스럽게 찾아가서
그 몸을 붉게 물들이는 꽃으로 피어나거나
혹은 네 몸속을 떠도는 바람으로 산다면
나는 너의 어디쯤에서 머물러 줄 수 있을까
너에게 스며들고 싶어 수없이 내 몸을 적셨지만
불어터진 인연의 껍데기로는 어림도 없어
반송우편함에 틀어박힌 편지처럼 쓸쓸하기 짝이 없네
네가 꽃일 때 나는 꽃이 되었다가
네가 바람일 때 나는 바람이 되었지
꽃도 바람도 네 몸속에 잠들지 못해
입질만 하는 붕어처럼 실없이 네 이름이나 불렀지
물수제비뜨듯 너에게 나를 조금씩 던지는 밤,
파르르 떨며 지나가는 내 민망한 얼굴을
어둠의 꼬리가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네
하필, 이 눈치 빠른 계절에 꼼짝없이 걸려든 내 몸은
누가 끌어다 놓았는지도 모르는 어둠 속에서
숨통이 턱턱 막히는데
봄밤이 너무 길어 자꾸만 너를 덮치려 하네
봄밤이 나를 자빠지게 하네

 

 

 

 

 

 

-월간『현대시』(2010,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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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조루의 봄밤

 


황구하

 

 

 


섬진강 자락 타고 내려온 물줄기
시나브로 젖어드는 밤
어디서든 꽃 피고 지고 반복되지만
나의 꽃은 단 한번
붉은 기운 속에 혼절한 사랑이었으면 한다

 


한 페이지 차르르 또 한 페이지 차르르
쉼표 없이 꽃향기 지리산 허리를 타고 넘어갈 때
불현듯 새떼울음 매달고 사라지는 구름

 


내 곁에 집이 없다

 


사방 꽃무늬 치마자락에도 숨 여는 소리
열아홉 순정과 빙글빙글 살을 섞는 벌레들
덩달아 몸 부푼 낱말 좁은 문지방을 넘나드는데
어지러워라, 내 사랑 또 어디로 날아가나

 


오래 어두워 점점 더 환해지는 기억 속
걸어 잠근 문장은 빈방에서도 출렁거리고
바닥없는 곳에도 달빛 낮게 깔려
허공 한 채, 바람의 손목을 끌어당긴다

 


거기 지금 홍매화 피었을까

 


낮은 굴뚝 따라가는 비기(秘記)의 틈새,
매화구름 베고 누운 당신을
나는 어떻게 필사해야 하나

 

 

 

 

 


-반년간『시에티카』 (2011, 하반기 통권 제 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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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른 봄밤
-못골 8

 


송진권

 

 

 


가마솥 속 같은 밤인데요
늙은 산수유 몸 밖으로
어찌 저리 많은 꽃들을 밀어냈는지
정수리에서 발꿈치까지
온몸에 차조밥 같은 꽃들을 피웠는데요
배고프면 와서 한 숟갈 뜨고 가라고
숟가락 같은 상현달도 걸어놓았구요
건건히 하라고 그 아래
봄동 배추도 무더기 무더기 자랐는데요
생전에 손이 커서 인정 많고
뭘해도 푸지던 할머니가
일구시던 텃밭 귀퉁이
저승에서 이승으로
막 한상 차려낸 듯한데요
쳐다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데요
이 푸진 밥상
혼자 받기가 뭣해서
꽃그늘 아래 서성이는데
훅 끼치는 할머니 살냄새
우리 강아지
우리 강아지
엉덩이를 툭툭 치는 할머니가
소복이 차려내신 밥상
그 누런 밥상에 스멀스멀
코흘리개 어린 내가
숟가락을 막 디미는데요
가마솥 속 같은 봄밤
뚜껑을 열자 김이 보얗게 오르는
배부른 봄밤인데요

 

 

 

 

 

 

-시집『자라는 돌』( 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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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인 봄밤

 


박이화

 

 

 

 

 

송도 기생 황진이의 사생활은 만고의 고전인데
신인가수 백모양의 사생활은 왜 통속이고 지랄이야
내가 보긴 황진이는 불륜이고 백모양은 연애인데……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가을밤 황국같은 황진이도 좋고
봄밤의 백합같은 백모양도 좋은데……
좋기만 한데
왜 이 시대엔 벽계수를 대신해 줄 풍류남아가 없고 지랄이야
명월이 만공산 할 제 달빛 아래 휘영청 안기고픈
사나이가 없고 지랄이야
아, 일도창해 하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길
어이타 이 몸과 더불어 유장하게 한 번 뒤척여 볼
박연폭포 같은 사내가 없고 지랄이야

 


봄밤은 고전인데
이화에 월백하는 봄밤은
만고강산의 고전인데

 

 

 

 

 


-시집『그리운 연어』(애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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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권혁웅

 

 

 

전봇대에 윗옷 걸어두고 발치에 양말 벗어두고
천변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
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
저 캄캄함 혹은 편안함
그는 자신을 마셔버린 거다
무슨 맛이었을까?
아니 그는 자신을 저기에 토해놓은 거다
이번엔 무슨 맛이었을까?
먹고 마시고 토하는 동안 그는 그냥 긴 관(管)이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이쪽저쪽으로 몰려다니는 동안
침대와 옷걸이를 들고 집이 그를 마중 나왔다
지갑은 누군가 가져간 지 오래,
현세로 돌아갈 패스포트를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편안한 수평이 되어 있다
다시 직립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듯이
부장 앞에서 목이 굽은 인간으로
다시 진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봄밤이 거느린 슬하,
어리둥절한 꽃잎 하나가 그를 덮는다
이불처럼
부의봉투처럼

 

 

 

 

 

 

 

(미당문학상 수상작 중앙일보,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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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강연호

 

 

 

 

 

낮에 지나쳐온 거리마다 분분했던 꽃잎
집에 돌아와 보니 몇 장은 우표처럼
어깨 한 귀퉁이에 여전히 달라붙어 있네
나는 과연 제대로 배달된 것일까
수취인 불명의 편지마냥 우두커니 서서
우주의 어둠으로 어둔 방을 바라보네
창밖으로 인공위성처럼
밤늦은 시민공원 운동장을 공전하는 사람들
한번 궤도를 이탈하면
다시는 진입하지 못한다는 듯
고분고분 트랙 안에서 걷거나 뛰고 있네
어디선가 전화벨이 끙끙 울다 지치면
가끔 연락하며 살자는 세상도
끙끙 앓다 지칠 테고
건너편 아파트는 띄엄띄엄 불이 켜지거나
켜졌던 불 다시 꺼지거나
쉴 새 없이 모스 신호를 날리고 있네
엘리베이터는 바쁘게 오르내리고
잘못 배달된 통닭은 식어가고
맥주는 김이 빠지고
어디선가 문이 쾅 닫히는 소리
물 내리는 소리
나는 한숨 쉬고 꽃잎 한 장 떼어내고
또 한숨 쉬고 꽃잎 두 장 다시 붙이고
영영 궤도를 잃고 떠돌 것만 같은 봄밤이네
무말랭이처럼 꼬들꼬들한 봄밤이네

 

 

 


 
- 계간『시와사상』(2009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