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과 사진/나의 디카시

부끄러운 등 /정호순

흰구름과 함께 2023. 11. 22. 09:07

부끄러운 등

 

어머니가 업어 주던 등

그 등은 따스하고 포근했었는데

등을 보여주는 것은 도망가는 것이 아닌데

오늘 난 홀로 호숫가를 걸으며

괜스레 등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네

 

―정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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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대기로 아기를 업고 있는 모습을 본 기억이 아슴하다. 선한 화가 박수근의 담백한 그림을 소환한다. 아기를 업고 있는 단발머리 소녀들의 모습은 어깨가 넓고 당차고 건장하다. 앞모습보다는 옆모습이나 뒷모습이 많다. 지극히 서민적인 일상을 경건하게 그려내는 美石을 동양의 장프랑스아 밀레라고 우긴 적이 있다.

 

 시인은 호숫가를 걷고 있는 까지 한 마리를 어머니의 따스한 등과 시인의 부끄러운 등으로 환유했다. 내 눈엔 물가에 내놓은 손자처럼 보인다. 할머니가 되던 날, 손자를 업어주고 싶은데 포대기를 파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캥거루처럼 앞에 메고 다는 아기 띠만 있었다. 누비포대기를 받아들고 뿌듯했다. 그러나 업어줄 일이 많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오래 업고 있으면 아기가 오자 다리가 된단다. 나갈 때는 유모차에 태우고 다닌다. 그래서 실상은 많이 업어주지 못했다. 아기를 안아주는 것보다 업으면 뒤로 힘이 실려 허리가 꼿꼿해져 편하다. 아기 업고 집안일도 다 했건만 지금은 요람이나 보행기에서 아기는 혼자 논다.

 

 엄마 등에 볼을 부비다 자고, 엄마 심장 소리를 들으며 젖을 먹고 자란 세대가 내 세대가 마지막인 것 같다. 그녀들의 등은 콧물 땟국물이 꼬질꼬질 반질거렸다. 나도 어머니 등에서 울고 보채다 잠이 들었을 것이고, 나도 내 아들을 그렇게 업어 키웠을 것이니. 여인들의 등은 요람이었고 침대였다.

美石의 그림 속 모델이 되었던 그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승에 있다면 요양 시설에서 등을 보이고 새우처럼 누워 마지막 잎새를 헤아리고 있겠지. 우리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지는 않는지. 등 떠밀려 찾아가는 것은 아닌지. 찬 겨울 등이 시린 이들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이따금 어머니는 '등 따습고 배부르면 됐지'라며 가난을 다독였다. 지금 나는 등 따시고 배부른데 이순 넘어서까지 나는 뭐땜시 이리 골머리를 앓고 있단 말인가. 바람에 몸을 맡긴 강파른 이파리를 보다가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까치처럼 걷는다.

 

 

손설강 디카시인

 

2023년 11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