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과 사진/내 시 - 내 시조

무명 시인 /정호순

흰구름과 함께 2023. 6. 19. 09:19

무명 시인

 

정호순

 

 

시인이 뭐 특별하다고 으스대는가

시가 뭐라고 지성인의 쌀이니

지식인의 도락이니 우쭐거리며 곤댓짓 하시는가

바보상자 먹방과 놀자 프로그램에 시선을 빼앗기고

감동은 눈물 찔끔 흐르게 하는

삼류 저녁 일일드라마보다 못하고

삼각관계 기억 상실증 재벌 자식 출생의 비밀을 유발하는

불륜 주말 연속극보다 재미도 흥미도

궁금증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을

어느 시인은 시집을 주면

라면 냄비 받침대로 쓰인다 조소하였고

어느 평론가는 축구, 탁구, 배드민턴 같은 취미

기호식품 오락이나 다름 아니라 했는데

읽히지도 않는 시집을 먹고 싶은 것 참고

수전노처럼 아끼고 모아, 모아

어렵게 시집을 낸다 한들

잔칫날 밥 선심 쓰듯 여기저기 무료로 노나주고

없는 시간 쪼개어 쓰고 보내 준

동병상련 고마운 시벗들에게

유유상종 품앗이하듯 답례품으로 쓰이고

혹시나 읽어줄까 꽤나 알려진 시인, 평론가에게

여기저기 사방팔방 딸 시집보내듯

정성스레 포장해 보낸들

누런 겉옷 벗지도 못하고 벽 한쪽 책 탑을 쌓다가

어느 날 먼지 쓴 채로 길거리로 쫓겨나는 것을

시는 산문보다 그나마 생명이 길다고

유통기한에 기대 보지만

데릴사위 촌계관청처럼

오픈 서점 구석 자리 앉지도 못해

인터넷 가상 공간에 뻘쭘히 서 있다가

잉크가 마르기도 전 시샘 바람에

벚꽃 떨어지듯 우수수 쏟아져 나오는

또 다른 무명 시집의 파상공격에 패잔병처럼 흩어진다

 

유명 시인 상 받는 자리 뒷줄에 둘러리로

자조적 웃음 물개박수 쏟아내며

언젠가는, 언젠가는 빛을 볼 거라는 희망에

어쩔 수 없이 써놓은 시를 또 묶으려고

애면글면 또 들여다보고 있는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 같은 멍청이

 

 

―계간『詩하늘 110』(2023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