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설
유금옥
이 고장에서는 눈을 치우지 않습니다
이 고장에서는 봄도 치우지 않습니다
지난 가을 요양 온 나는
그리움을 치우지 않고 그냥 삽니다
대관령 산비탈 작은 오두막
여기서 내려다보면, 눈 내린 마을이
하얀 도화지 한 장 같습니다
낡은 함석집들의 테두리와 우체국 마당의 자전거가
스케치 연필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3월, 겨울이 긴 이 고장에서는
폭설이 자주 내리지만 치우지 않고 그냥 삽니다
여름도 가을도 치운 적이 없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도시처럼 눈을 포클레인으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다만 담뱃가게와 우체국 가는 길을
몇 삽 밀쳐놓았을 뿐입니다 나도 山만한 그대를
몇 삽 밀쳐놓았을 뿐입니다
山 아래 조그만 태극기가 그려져 있는
면사무소 뒷마당,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포클레인 한 대가 보입니다
지지난해 들여놓은 녹슨 추억도 이 고장에서는
치우지 않고 그냥 삽니다
―월간『현대시』(2009년 4월호)
시들시들 하다가 마음에 다가오는 시 한 편을 만나면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아침입니다. 어젯밤 뉴스에 이 고장에 눈이 60센지가 더 와 1미터가 넘을 것이라는 예보 속에 날이 밝았는데 제가 어려서 살던 산골에서도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면 눈이 내 키만큼 쌓여 문이 열리지도 않았습니다.
눈이 많이 내린다는 소식에 지지난해 30센지의 폭설이 서울에 내렸을 때도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는데 이 고장처럼 1미터가 넘는 눈이 내린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을 하다가 떠오르는 즐겁지도 않는 상상 그냥 지워버립니다. 눈이 오면 마침 주말에 맞춰 스키 타러 갈 생각에 가슴이 설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은 같은 공기를 먹고사는 하늘 아래 축사가 무너질까 비닐하우스 내려앉을까 밤새 잠 못 자고 눈을 치우는 사람도 있겠지요.
몇 년 전 이 고장에 산불이 크게 나 고찰의 종까지 태워버리고 어느 핸가 가문이 극심해 소에게 먹일 물도 없다고 연일 수십 대의 급수차로 물을 공급하는 걸 보았습니다. 산에 눈이 쌓이면 불이 날 일도 없을 것이고 올핸 봄 가뭄이 해소되어 물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런 날은 난로 위에 찻주전자 물 끓는 소리가 눈 속의 적막에 파묻히고 문도 열리지 않은 은색의 오두막에 갇혀 아무도 오지 않는 줄을 알면서도 찾아오는 이 있을까 조그만 창문을 열어 보고 싶습니다.(2011년 2월 12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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