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과 사진/시 읽기

통증 /고영민

흰구름과 함께 2024. 3. 12. 09:40

통증

 

고영민

 

 

중국에는 편지를 천천히 전해주는
느림보 우체국이 있다지요
보내는 사람이 편지 도착 날짜를 정할 수 있다지요
한 달 혹은 일 년, 아니면
몇 십 년 뒤일 수도 있다지요
당신에게 편지 한 통 보냅니다
도착 날짜는 그저 먼 훗날
당신에게 내 마음이
천천히 전해지길 원합니다
당신에게 내 마음이 천천히 전해지는 걸
오랫동안 지켜보길 원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수십 번, 수백 번의 후회가 나에게 왔다가고
어느 날 당신은
내가 쓴 편지 한 통을 받겠지요
겉봉을 뜯고 접은 편지지를 꺼내 펼쳐 읽겠지요
그때 나는 지워진 어깨 너머
당신 뒤에 노을처럼 서서
함께 편지를 읽겠습니다
편지가 걸어간 그 느린 걸음으로
내내 당신에게 걸어가
당신이 편지를 읽어 내려가며 한 홉 한 홉
차올랐던 숨을 몰아 내쉬며 손을 내려놓을 즈음
편지 대신 그 앞에
내가 서 있겠습니다.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2 올해의 좋은시 100選』(아인북스, 2012)

 


    편지가 이메일에게 자리를 내 준지가 꽤나 오래된 것 같습니다. 예전엔 버스를 탈 때 종이로 된 버스표를 안내양에게 건네야 버스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좀 더 뒤엔 쉽게 찢어지고 수명이 빠른 종이 버스표 대신 주조물로 만든 동전 모양으로 된 버스표가 나왔습니다. 토큰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토큰이라는 말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어 교통카드시대가 되었고 토큰이라는 말은 바로 소멸되어버렸습니다. 말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생성하고 융성을 거치다가 용도가 다하면 폐기되어 소멸이 되면 그만 이름조차 없어지게 됩니다. 아날로그 세대들에게 친근한 낱말인 편지라는 단어도 머지않아 잊혀진 말이 되지 않을까 아쉬운 생각도 듭니다. 


   세로로 금을 그어놓은 편지지에 연필로 글씨를 쓰고 봉투에 넣고 우표를 사서 우체통에 넣는, 번거롭지만 정성과 노력이 들어간 옛날의 편지. 보내고 난 뒤에도 답장이 없으면 야속해 혹시 받아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 늘 궁금하던 편지. 이젠 스마트폰이 있어 컴퓨터를 켜지 않아도 편지 한 장 보내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보다 쉽습니다. 물론 상대방이 언제 읽어봤는지 날짜 뿐 아니라 몇 시, 몇 분, 몇 초까지 알 수 있는 초스피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국 베이징에 편지를 천천히 배달해주는 우체국이 생겼다고 합니다. 참으로 재미난 발상의 우체국인 것 같습니다.


   보통 우체국과 다를 것이 없는데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편지가 도착하는 날짜를 정할 수 있다고 합니다. 도착한 날을 한 달로 정할 수도 있고 1년이나 아니면 몇십 년 뒤로 정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부친 것 중에 가장 늦게 도착 예정일인 편지는 2046년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분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영화 편지처럼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박신양(환유) 최진실(정인) 주연공인 편지에서는 환유가 악성종양에 걸렸는데 살아 있는 동안 환유는 홀로 남을 아내를 위해 편지를 씁니다. 그 편지는 환유가 죽고 난 뒤 정인에게 도착을 합니다.


     시에서는 노을을 등지고 서서 편지를 함께 읽는 반전으로 끝을 맺습니다만 그 또한 허구의 상상일 뿐입니다. 영화와는 달리 느림보 우체국의 손님들은 대부분 자기자신이 수취인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직접 부치고 직접 받아보는 수신인과 발신인이 같은 편지, 어째 기분이 좀 묘하지 않습니까. 한 달 후, 또는 몇 달 후, 아니면 몇 년 후에 자기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다면 어떤 내용으로 쓰고 싶으신지요? 자기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한번 보내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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