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과 사진/시 읽기

은둔지 /조정권

흰구름과 함께 2024. 1. 11. 16:29

은둔지

 

조정권

 

 

시는 무신론자가 만든 종교.

신 없는 성당,

외로움의 성전,

언어는

시름시름 자란

외로움과 사귀다가 무성히 큰 허무를 만든다.

외로움은 시인들의 은둔지,

외로움은 신성한 성당,

시인은 자기가 심은 나무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

나는 나무에 목매달고 죽는 언어 밑에서

무릎 꿇고 기도한다.

시인은 1인 교주이자

그 자신이 1인 신도,

시는 신이 없는 종교,

그 속에서 독생獨生하는 언어.

시은市隱*하는 언어

나는 일생 동안 허비할 말의 허기를 새기리라.

   

 

*세속 속에서의 운둔.

 

 

 

ㅡ『유심(2013. 4)

시집고요로의 초대(민음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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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에게 있어 는 연인이자 애인, 오르고 싶은 나무 그리움의 대상이다. 마냥 말을 걸고 싶고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고 싶다. 그래서 많은 시인들은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는 속내를 에게만은 들키고 싶고 토로하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시는 못 믿을 애인처럼 속마음을 잘 드러내 주지를 않는다.

 

  그 뿐 아니라 는 들판에 홀로 서있는 나무처럼 외따롭고 안개 속처럼 제 모습을 감춰 오리무중이다. 김종삼 시인은 시가 뭐냐고 물으면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했고 이성복 시인은 시에 대한 각서를 쓰기도 했다. 이우걸 시인은 아직도 못 다 새긴 자화상이 있다고 했고 구상 시인은 사과를 그리다 보면/배가 되고/배를 그리다 보면/사과가 된다 고 했다.

 

  김명리 시인은 물 없이 삼키는, 이 땅엔 처방전이 없다고 시에 극약처분을 했으며 김현수 시인은 시작법을 위한 기도에서 저희에게/한 번도 성대를 거친 적이 없는/발성법을 주옵시며/나날이 낯선/마을에 당도한 바람의 눈으로/세상에 서게 하소서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다. 시 쓰기의 어려움과 시 쓰기의 간절함, 오죽하면 화자는 '시'를 두고 신자가 만든 종교가 아니라 무신론자가 만든 종교라고 했을까...

 

-조정권 시인의 타계 소식을 뒤 늦게 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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