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이홉
문 인 수
누가 일어섰을까. 방파제 끝에
빈 소주병 하나,
번데기 담긴 종이컵 하나 놓고 돌아갔다.
나는 해풍 정면에, 익명 위에
엉덩이를 내려놓는다. 정확하게
자네 앉았던 자릴 거다. 이 친구,
병째 꺾었군. 이맛살 주름 잡으며 펴며
부우- 부우-
빠져나가는 바다,
바다 이홉. 내가 받아 부는 병나발에도
뱃고동 소리가 풀린다.
나도 울면 우는 소리가 난다.
―시집『배꼽』(창비, 2008 )
누구였을까요. 바닷가 끝까지 와서 이홉 소주를 마시고 간 이는...분명 세상을 이긴 사내가 아니라 진 사내일 것 같은데 종이컵에 담긴 번데기를 하나씩 입에 넣으며 몇 번에 나누어 마셨을까요. 아니면 답답한 가슴을 쓸어 내리며 화자처럼 한 번에 병나발을 부우- 부우- 불었을까요.
삼발이 방파제 돌머리에 앉아서 막막한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누구를 생각했을까요. 두고 온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돌아온 수표를 막지 못해 파산이 나서 쑥밭이 된 사업체를 생각했을까요. 혹여 이 사내 몽롱한 정신의 술김에 모두 다 잊고 싶어서 그대로 수평선 쪽으로 걸어 들어가 아무런 족적도 남기지 않고 홀연 바다 밑으로 사라진 것은 아닐까요.
그 사내가 바닷가의 끝인 방파제까지 와서 꺾고 버리고 간 소주병 속으로 이홉 크기의 바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무심히 들락날락합니다. 익명의 그 사내, 술이 깨서 집으로 무사히 잘 돌아갔겠지요. (2008년 11월 17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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